[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춘택과 석례(5)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춘택과 석례(5)
"백성들의 탄식이 강물처럼 길게 흐른다"
  • 입력 : 2012. 06.04(월) 00:00
  •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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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군포시에 자리 잡은 김춘택의 묘. 그의 할아버지 김만기와 아버지 김진구, 동생 김복택, 아들 김덕재의 묘지가 한 곳에 터를 잡은 이 곳에는 김진구의 신도비가 세워져 유배로 점철된 그의 슬픈 가족사를 알려주고 있다.

유배인 처지에도 탐관오리 비판하며 본분 당부
"훗날 향토지에 제주성 살았음을…" 글 남기기도

김춘택은 어려서부터 작은 할아버지인 서포 김만중의 인정을 받아 그 슬하에서 수학했으며, 청년 시절에는 천재로 불릴 만큼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게다가 숙종 임금의 정비 인경왕후의 친정 조카라는 귀족적 배경에서 자라 대단한 자부심을 지녔음을 그의 삶과 문장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평생 과거를 보지 않고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았던 그는 제주 유배 중 여러 문인을 발굴하는 데 대신 그의 학문적 열정을 쏟아냈다. 그의 아버지 김진구의 제자이기도 했던 고만첨·오정빈·정창원은 당시 과거에 한꺼번에 합격하는 기염을 토한 뒤 중앙 정계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들이 임금이 친히 치르는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에 올라갈 때 김춘택은 추천서라 할 수 있는 편지를 써준다. 변방 섬 출신인 제자들이 혹시나 중앙 관리들에게 무시당할지도 모를 상황을 차단하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이들은 그의 후광을 업어 훗날 성균관박사, 전적, 예조좌랑, 만경현령, 순천판관 등을 역임하게 된다.

▲김진구의 신도비. 제주에서 유배 중 낳은 아들 '제택'(흰색 점선)의 이름이 올라 있다.

"우리나라에서 제주는 큰 바다 밖에 있어 풍속이 본래 거칠고 누추하여 글을 하는 선비들의 풍조는 떨치지 못하였다. 전부터 어사를 파견하여 우수한 자를 선발해 전시에 나아가게 허락하고 대과를 보게 권장하고 있으나 그 시험 보는 곳이 한 주(州)에 그치며 비록 과거 보러 갈 수 있다고 해도 세상에서는 간혹 비하할 것이다. 나는 말하건대 한 주는 참으로 한 나라보다는 협소하며, 한 나라라고 해도 천하보다는 작지 않은가. 천하라고 반드시 큰 것은 아닐 것이며, 한 주라고 좁은 것은 아닐 것이니, 세상은 참으로 제주과(濟州科)를 구실거리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오정빈이 전시에 나아감을 보내는 서' 중에서)

그의 시와 문장은 제주섬 곳곳에 알려져 많은 이들이 그에게 청한 글이 지금까지 남아 전해지고 있다. 간옹 이익의 손자인 이윤의 비문을 짓고 썼으며, 그동안 이익태 제주목사 재임 중 제주 유생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임금에게 보내는 상소문도 그의 문집에 실려 실은 그가 지어준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주 유생들이 귤림서원에서 사신(충암 김정·규암 송인수·동계 정온·청음 김상헌)과 함께 송시열의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요청하는 내용의 이 글은 당시 제주 유림사회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을 알려준다.

심지어 유배지를 옮기기 위해 별도포구에 구금돼 있을 때는 어느 기녀가 8첩 병풍 종이를 가지고 와서 매화와 대나무를 그려달라고 사정한 일도 있었다. 제주에서 만난 기녀 석례를 친구로 삼고, 그녀의 정절과 자신의 처지를 대비시켜 시를 지을 정도의 풍류남아였던 김춘택은 "음식과 남녀의 육욕은 사람이라면 없을 수가 없다"는 글도 남겼다. 그러나 그는 '호색'과 '음란'의 차이를 설명하거나 "즐거우면 음란하기 쉽고, 애절하면 다치기 쉬워, 인정이 그러함은 남녀의 사이에는 심한 것"이라면서 지나친 욕망을 경계했다.

제주에서 지은 글 중에는 학자적 면모를 보여주는 것들도 많다. '수해록(囚海錄·바다 속에 갇힌 기록)' 중 '간서변의(看書辯疑·책을 보고 의문점을 말함)'에서는 시경과 서경, 예기, 논어 등 유교 경전 내용에 대해 해설을 하거나 주자나 공자 등의 주장을 반박하기도 했다. 글을 단순히 외우고 활용하는 차원을 넘어서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지식인의 전형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그의 성정은 유배인의 처지에서도 서슴지 않고 탐관오리를 비판하는 기개로 나타났다. 한가하게 유람하거나 사냥하는 제주목사에 대해 "백성들의 탄식이 강물처럼 길게 흐른다"고 비판했으며, 민정을 시찰하기 위해 제주에 들어온 어사를 두고서는 "간혹 관리로 옮겨온 나그네/ 계속 머물며 돌아갈 생각 않네/ 아름다운 여자 더욱 빛내주며/ 좋은 말 언제든지 가질 수 있고/ 잠녀의 진주도 몰래 재빨리 얻네/ 섬 백성 무엇을 바라는가/ 어사의 추상같은 위엄 있기를"이라는 시로 본분을 망각하지 않게 했다.

이러한 기개를 지닌 그도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제주 유배생활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토로했다. 그리고 먼 훗날 제주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글을 남겨놓았다. "지나온 자취 서글픈 고결한 뜻/ 남은 생애 나무에 바람 불 듯하니/ 훗날 향토지에/ 옛 성 동쪽에 살았음을 잊지 말기를." 그가 제주에 머무는 동안 지은 시문이 제주문화원에서 문집으로 발간돼 300년 전 조선을 풍미했던 김춘택을 기억하게 해준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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