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윤식과 의주녀(1)

[제주 유배인과 여인들]김윤식과 의주녀(1)
변방에서 유배인의 우두머리가 되다
  • 입력 : 2012. 08.20(월) 00:00
  • 표성준 기자 sjpyo@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한말 외무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한 운양 김윤식은 을미사변에 연루돼 제주에 종신 유배됐다.

을미사변 때 왕후폐위조칙 서명해 종신유형
제주성 감옥소 투옥되자 유지들 앞다퉈 방문

▲유배 중 매일 보고 들은 일을 기록한 일기 '속음청사'.

한말 외무대신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한 운양 김윤식(金允植·1835~1922)은 1895년 을미사변(민비시해사건)의 여파로 제주에 종신 유배됐다. 유배 중 매일 일기를 썼던 그는 제주에서 체험한 일을 상세히 기록한 속음청사(續陰晴史)를 남겨 지금까지도 제주의 근대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속음청사에는 1901년 제주도민과 천주교도들 사이에서 일어난 이재수난의 전말과 옛 제주성 안의 지형이 세밀히 묘사돼 사료적 가치를 더해주고 있다.

김윤식은 명문 청풍김씨 후손으로 1835년 한강변 두뭇개(지금의 서울 성동구 옥수동)에서 태어났다. 인조 때 대동법을 시행한 영의정 김육이 그의 9대조이며, 조선 말기 성리학의 대가인 유신환에게 학문을 익혔다. 1865년 31세의 나이로 비교적 늦은 나이에 초시에 합격하고, 1874년 40세에 증광시 문과 병과에 급제했지만 이후 벼슬길은 승승가도를 달려 1876년 황해도 암행어사, 1880년 순천 부사를 역임했다. 1881년에는 정부의 개화정책에 따라 영선사(領選使) 자격으로 60여 명의 학도를 인솔하고 중국에 건너가 신식병기의 제조법과 조련법도 익히게 했다.

그가 중국에 머물고 있을 때인 1882년 6월 국내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게 되자 그에게는 민비의 밀명이 전해진다. 난을 일으켜 궁궐을 점령한 군병들을 피해 달아났던 민비가 몰래 청국 정부에 출병을 요청하는 밀명이었다. 강화도조약으로 조선의 우월적 지위를 빼앗겼던 청은 병자호란 이래 처음으로 군란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수척의 군함에 군사 1000명을 탑승시켜 조선으로 급파했다. 이어 김윤식도 청군제독이 이끄는 청국함 '위원'호에 탑승해 귀국하고, 대원군은 33일 만에 청군에 의해 톈진(天津)에 납치된다.

1884년 10월 갑신정변이 일어날 때에도 그는 다시 청의 영으로 들어가 청군의 출병을 간청해 위안스카이(袁世凱) 등이 군대를 이끌고 출동한다. 청군은 왕을 호위하던 일군을 공격해 다시 왕을 옹위하고, 김옥균과 박영효 등이 일으켰던 갑신정변도 수포로 돌아간다. 두 차례에 걸쳐 민비정권의 위기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운 그는 강화부 유수, 홍문관 부제학, 협판통리내무아문사무, 협판군국사무, 협판교섭통상사무, 공조판서, 예문관 제학, 지의금 부사 등 요직을 두루 역임하게 된다.

그러나 갑신정변 이후 김윤식은 조선에 머물던 위안스카이와 대원군을 귀국시켜 정권을 맡기는 문제를 논의하게 된다. 외세에 흔들리고 실정이 거듭되는 난국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대원군의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이때 이 사실을 알게 된 민비의 미움을 받은 그는 1887년 5월부터 1893년 2월까지 충청도 면천(沔川)에 유배된다. 그후 동학농민운동에 이어 청일전쟁이 발생해 민비가 물러나고 대원군 섭정체제의 군국기무처회의가 성립되자 독판교섭통상사무(외무독판)에 기용된 뒤 제1차 김홍집 내각과 2차 조각에서는 외무아문대신으로 우리나라의 외교문제를 책임졌다.

1895년 8월에는 일본 낭인들이 민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듬해 2월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난하는 아관파천 사태가 벌어진다. 이에 내각을 영도하던 김홍집 등은 피살되고, 내부대신 유길준 등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그 역시 여러 곳을 전전하며 위기를 모면했지만 1897년 12월 환갑이 넘은 나이에 제주도 종신 유형을 선고받는다. 민비가 시해됐을 때 왕후폐후조칙(王后廢位詔勅)에 서명하고 민비를 시해한 무장대에 대해 각국 공관에 질의·조회했기 때문이었다. 이듬해인 1898년 1월 6일 함께 제주도 종신형을 선고받은 이승오와 함께 인천항에서 해룡선(海龍船·기선)에 탑승한 그는 군산과 목포 등을 거쳐 5일 만인 11일 제주도 산지항에 도착했다.

당시 제주목사는 훗날 방성칠난 때 제주성을 점령당한 책임을 지고 파직되는 이병휘였다. 김윤식은 도착하자마자 감옥에 투옥됐다. 이때 제주에는 전 궁내부 참사관 서주보와 전 시종관 정병조, 전 한성부 관찰사 김경하 등 많은 정치인들이 을미사변 등에 연루돼 먼저 유배돼 있었다. 당시 제주에 유배된 정치범은 모두 13명으로 김윤식은 "제주적인이 하루하루 많아져 드디어 섬에 넘치려고 한다"고 기록했다.

김윤식이 이승오와 함께 투옥된 사실이 알려지자 제주도의 선비들이 앞다투어 찾아가 사귀기를 청했다. 한말 고관이자 석학이며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였던 그는 제주에서도 유배인과 유지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노회한 정치인으로서 영향력을 유지해갔다.

/특별취재팀=표성준기자·김순이 문화재청 문화재감정위원· 김익수 국사편찬위 사료조사위원·백종진 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1 개)
이         름 이   메   일
5245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