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141)마리아나제도<br>르포-(7)티니안 한인의 비극

[고난의역사현장 일제전적지를 가다](141)마리아나제도<br>르포-(7)티니안 한인의 비극
한인 유골 5000여구 발굴 충격을 던져준 통한의 섬
  • 입력 : 2013. 11.13(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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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다본 원폭피트 모습. 밀림 한가운데 하트모양의 공간 양쪽 끝에 조그많게 원폭피트가 보인다. 이승철 기자

사탕수수 재배농장 일대에 거주했던 한인 규모 추정단서 찾아내
티니안 중심지 산호세 마을엔
이곳에서 죽어간 희생자 기리는 평화기원 한국인 위령비만 쓸쓸
지속적인 실태규명 필요성 불구 당국 관심·지원은 뒷전


이름도 없는 한 점 섬에서 핵폭탄 발진기지로 세계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티니안은 우리에게는 강제 동원 한인이 수없이 죽어간 비극의 땅이다.

1977년 5월, 티니안의 밀림속에서는 한인 유골 5000여구가 발견돼 충격을 줬다.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당시 미군정과 오키나와현인회가 시신을 대충 수습해서 가매장했던 유골들이다. 이 유골은 당시 대구대 설립자인 고 이영식 목사가 1975년 티니안 시장으로부터 한인 유골이 정글에 가매장돼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발굴한 것이다. 유골이 매장된 곳에는 '조선인지묘'(朝鮮人之墓)라고 쓰인 철근콘크리트 비석이 있었다고 한다.

당시 찾아낸 유골들은 그해 5월15일 충남 망향의 동산으로 봉환됐다. 이 일을 계기로 (사)해외희생동포추념사업회가 탄생했다. 그때까지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티니안의 비극이 드러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일본 패전 70년을 앞둔 오늘날까지도 당시 티니안에 얼마나 많은 한인들이 강제로 끌려가고, 희생됐는지 구체적 실상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취재팀은 티니안 밀림속에서 사탕수수 재배 등에 동원됐던 한인의 규모를 일부나마 추정할 수 있는 단서를 찾아냈다.

티니안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브로드웨이를 따라 북쪽으로 가다 노스필드 비행장 못미친 지점 서쪽 밀림 속에 당시 만들어진 히노데신사가 있다. 세계 3대 매운 고추의 하나인 '도니살리'가 빨갛게 익어가는 신사터 옆으로 난 소로를 따라 50여m 갔을까. 허물어져 가는 시멘트 구조물로 된 벽체 일부가 눈앞에 나타났다. 건물 앞에 세워진 안내문에는 '오키나와 주택'이라고 적혀 있다.

▲경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노스필드 비행장 활주로. 이승철기자

영어와 일본어로 된 안내문에는 '1944년까지 2000명의 한국인을 포함 1만8000명 민간인들이 거주했다. 티니안전투에서 거의 1만5000명이 살아남았으며, 2차대전 후 귀국길에 오를 때까지 섬의 서부지역에 수용돼 있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오키나와 주택이 있는 일대는 전범기업 남양흥발 제4농장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히노데신사를 중심으로 한 남양흥발 농장 일대에 적어도 2000명의 한인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신사 근처에는 오키나와 출신이 대부분인 일본인과 한인 등이 많이 살았다.

사탕수수 재배 등에 동원됐던 한인들은 미군과의 결전에 대비한 일본군 기지구축 등에 동원돼 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밀림속에서, 혹은 비행장에서 숱하게 죽어갔다. 이 일대는 노스필드 비행장과도 가까운 거리다.

6인승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노스필드 비행장 일대는 짙푸른 수목이 우거진 밀림지대다. 밀림 사이로 2개의 활주로가 곧게 뻗었다. 그 옆으로 마치 하트 모양처럼 생긴 텅 빈 공간이 나타난다. 인류 최초로 핵폭탄을 투하한 에놀라게이가 발진했던 원폭피트가 있는 곳이다. 원폭피트가 양쪽 끝에 희미하게 보인다.

밀림지대의 대부분은 사탕수수 재배농장이었다. 이후 일본군이 군사비행장으로 만들고, 미군이 이를 활용해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핵폭탄을 투하한 발진기지로 이용한 것이다. 이 비행장을 중심으로 해서 수많은 한인이 총탄 속에 희생된 것이다. 현지에는 한인 희생을 추모하는 기념비가 조성됐다.

▲산호세 마을에 세워진 평화기원 한국인 위령비. 이승철기자

티니안의 중심지인 산호세 마을. 호젓하고 자그마한 이 마을에도 법원과 경찰서 소방서 은행 등 있을 것은 다 있다. 마을 북쪽에는 티니안에서 한인 유골을 발굴한 뒤로 민간단체가 세운 '평화기원한국인위령비'가 서 있다. 이 위령비는 1977년 12월 제2차세계대전 태평양지역 한국인희생자위령사업회(회장 이용택)에 의해 건립됐다. 이곳에서는 매년 위령제가 열린다. 그리곤 그뿐, 지속적인 실태조사 등을 통한 규명작업 등이 필요하지만 당국의 관심과 지원은 뒷전이다.

전쟁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지만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

직접 만날 수는 없었지만 티니안에는 강제노역으로 현지에 남은 한인 후손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취재팀이 만난 박권석 씨는 티니안에 거주한지 올해로 28년째다. 그의 증언이다.

"강제 노역됐다가 (이곳에) 남은 조선인을 4명 정도 만난 것 같습니다. 한인 2세가 5명 정도 사는데 보통 60~70대로 모두 한국어는 할 줄 모릅니다. 그 중 박 씨는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와 살다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새 아버지의 성을 쓰게 된 경우입니다."

고국으로 귀환하지 못한 사람들은 현지에서 고국을 그리워하며 뿌리를 내렸다.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렵다. 전쟁의 흔적이 풍경이 된 섬 티니안의 한인 역사가 잊혀져서는 안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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