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제66주년 4·3희생자 추념일 기념 일본 특별좌담

[특집]제66주년 4·3희생자 추념일 기념 일본 특별좌담
4·3의 역사적 기억 부활… '어둠에서 빛의 역사로'
  • 입력 : 2014. 04.28(월) 00:00
  • 이윤형기자 yhlee@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지난 20일 일본 도쿄의 한 카페에서 소설가 김석범과 현기영, 이문교 4·3평화재단 이사장이 4·3의 역사적 기억을 회복하기 위한 특별좌담을 가졌다.

지난 19일 일본 '제주도 4·3사건을 생각하는 모임·도쿄'가 주관한 제66주년 4·3사건 추모집회에서 조우한 소설가 김석범과 현기영이 제주4·3평화재단 이문교 이사장의 사회로 다음날 도쿄의 한 카페에서 좌담한 내용을 요약했다. 좌담 정리는 제주영상문화연구원 양원홍 원장이 담당했다.

▶이문교=4·3의 암흑 시절에 천장 부근에서 한줄기 햇살이 가늘게 비쳐드는 바라지처럼 한국과 일본에서 문학을 통해 4·3의 진실 규명에 앞장서 온 두 분을 뵙게 되니 무척 반갑습니다. 이제 국가추념일로서 4·3이 정립되면서 어둠에서 빛의 역사로 바뀌어야 할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이번 좌담에서 4·3의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처참한 역사를 해원하고 화합하며, 바르게 해결해 오고 있는 제주도민의 평화정신을 선양시켜보고자 합니다. 먼저 김석범 선생께서는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이신데 아직도 건강하십니다. 『화산도』한국어판 출판을 기다리는 독자들이 많은데요?

▷김석범=작년에는 몸이 아파 고생했는데 이제 어느 정도 회복된 것 같습니다. 『화산도』한국어판은 내년 3월까지는 완료될 것 같습니다. 아마 1, 2부로 나누어 전체 18~20권 정도로 번역본이 출판될 것 같습니다.

▷현기영=구순을 뜻하는 한자 표현에 '동리(凍梨)'라고 있습니다. '언[凍] 배[梨]'라는 뜻으로, 나이 90 정도가 되면 얼굴에 반점이나 검버섯이 생겨 마치 언 배 껍질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표현이 생긴 모양인데 선생님께서는 전혀 동리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건강하게 보이십니다.

▶이=이미 잘 알려지다시피 『화산도』는 1980년대 초 일본의 문예잡지『문학계』에 연재돼 극찬을 받았습니다. 4·3당시 지식인들의 조직운동과 게릴라 활동, 이에 대한 미군정과 군경의 탄압, 도민 피해 등을 밀도 있게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한에서나 북한에서나, 민단에서나 조총련에게서나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하고 양쪽에서 '불편한 인물'로 낙인찍히면서도, 좌우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진정한 한국의 역사 규명을 호소하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김=기억이 말살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가 없는 데는 인간의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요? 반세기가 넘도록 기억을 말살 당한 4·3은 한국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입 밖에 내놓지 못하는 일, 알고서도 몰라야 하는 일인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불렀습니다. 공포에 질린 섬사람들 자신이 스스로 기억을 망각으로 들이 쳐서 죽이는 기억의 자살인 것입니다. 나는 결코 묻혀져서는 안될 우리의 기억을 부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까마귀 죽음』으로 처음으로 이 기억을 부활시켰습니다.

▷현=선생님께서는 '기억의 자살'이란 말을 쓰셨는데 저는 이것을 '기억의 타살'이란 말로 많이 씁니다. 어쩌면 우리 도민들 스스로가 망각하고픈, 지워버리고 싶은 역사이지만, 4·3 이후 막강한 공권력에 의한 금기였으므로 '기억의 타살'이란 말을 쓰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제시한 한 장의 캄보디아 내전 사진이 생각납니다. 폭격 맞아 집은 반쯤 허물어졌는데, 현관 앞 계단 아래 민간인 시체들이 널부러져 있고 그 계단 맨 위에 한 어린 소년이 처연한 눈빛으로 카메라를 응시하는 장면입니다. 거기에 죽어 널부러진 사람들이 살아남은 그 소년에게 그 현장 밖의 사람들을 그러한 시선으로 응시할 의무를 부여했다고, 롤랑 바르트는 그 사진에 주석을 달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현장 밖의 사람들은 그 소년의 처연한 눈빛을 통해 그 비극, 그 떼주검을 보게 되는 것이죠. 주제넘게 말해서, 그 소년이 바로 나였던 셈이죠. 4·3의 진상에 대한 기억을 말살하려는 '망각의 정치'로 인하여 민중의 집단적 기억은 무참히 깨어져 있었던 시절에 『순이 삼촌』은 그렇게 태어났던 것이죠.

▶이=제주에서 최초의 4·3진상규명운동은 1960년 5월 제주대 법학과 학생 7명이 '4·3사건진상규명동지회'를 결성 도보로 제주도 일주를 하며 7일 동안 현장 조사한 것입니다. 이 조사 결과는 그해 6월 국회 4·3사건진상조사단이 제주에 왔을 때 진상조사반에 나가 증언했지요. 이 활동으로 나는 1년 후배인 박경구와 함께 이듬해 5·16 직후 긴급 구속되어 서울서대문형무소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지요. 일본에서 4·3운동은 어떠했습니까?

▷김=일본에서 4·3 운동 발전의 획기적 계기가 된 것은 40주기가 되는 1988년이었어요. 그때 처음 40주년 추모행사를 치루면서 4·3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했어요. 이 모임 주최로 '제주도4·3사건 40주년 추모기념강연회'를 가졌는데 재일한국인 뿐만 아니라 일본의 지식인들 속에서도 큰 파문을 일으켰어요. 1991년 이후에는 오사카까지 확산됐고, 1998년 50주기를 준비하면서 조동현, 고이삼, 문경수 등이 합세해서 4·3이 일대 대중운동으로 번져가게 됩니다.

▷현기영=참 감동스러운 이야기네요. 『순이 삼촌』은 4·3 30주년이 되던 1978년 여름에 쓰여졌습니다. 당시 정보기관에 끌려가 25일간이나 고문을 받았습니다. 결국 나는 풀려났지만 『순이 삼촌』은 금서로 묶였습니다. 그 후 서울에는 '제주사회문제협의회', 제주에는 '제주4·3연구소'가 설립됐습니다. 87년 민주화운동의 성공과 함께 2000년 4·3 특별법 제정, 2003년 대통령 사과로 이어졌고, 4·3희생자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됐습니다. 불가능을 꿈꾸었던 제주도민에게는 참으로 기적 같은 일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제주도민들은 국내·외에서 4·3진상 규명을 위해 투쟁해 왔고 그 결과 진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4·3의 역사적 기억을 회복하는 작업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김=4·3 문제의 올곧은 해결은 아직 멀었지만 공권력에 의한 재평가와 아울러 진상규명, 명예회복 사업은 큰 걸음을 내딛기 시작했습니다. 반세기 이상 지난 이제,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니지만 한없이 죽음에 접어드는 깊은 망각 속에 얼어붙었던 기억이 지상으로 솟아나 햇빛을 보고 있습니다. 영원히 말살할 수 없었던 기억의 부활이자 기억의 승리입니다. 4·3은 제주만이 아니라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의 문제이기에 이 사건의 부활은 우리 역사를 바로 세우고 재정립하는 크나큰 사변이라고 믿습니다.

▷현=국가추념일 지정으로 마치 4·3의 모든 것이 해결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끊임없이 4·3을 재기억 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 입구에 다음과 같은 경구가 쓰여 있죠. "아우슈비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단 한 가지, 인류가 그것을 잊는 것이다." 이 문장에서 우리는 아우슈비츠 대신 4·3을 대입해야 하겠습니다. 불행한 과거를 망각하는 자는 개인이든 사회이든 간에 그 과거를 다시 반복할 운명이 된다는 것이죠.

▷김=제주4·3평화공원에 백비가 있어요. 그런데 그 백비에 통일이 되면 글자를 새겨놓는 걸로 알고 있는데 나는 그 백비를 지금이라도 세워 놓아야 한다고 봅니다. 통일이 된 다음에 백비에 글을 써서 정명하는게 아니라 백비를 일으켜 세워서 정명을 하면 통일이 이루어집니다. 백비를 세우는 일은 우리의 통일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섬 제주도로부터 민족 통일의 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세계인들이 제주에 와서 4·3을 통해 평화를 배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전쟁이나 재난의 슬픈 자취를 찾아가는 다크 투어리즘이 활기를 띠고 있는데, 그러한 관광이 바로 평화교육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4·3을 통해 유익한 평화교육이 될 수 있도록 문화예술의 창의력으로 잘 기획되고 잘 꾸며지기를 기원합니다.

▶이=이제 4·3은 빛의 역사로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4·3 문제를 과거의 갈등 프레임에 가두어 놓는다면 제주사회는 정체된 시간 속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4·3을 해결한 자랑스러운 역사에 가치를 부여하고 후예들이 올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이 시대를 사는 우리들의 책무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두 분을 통해 역사는 구비가 있어도 바르게 흘러간다는 진리를 새삼 느껴집니다. 감사합니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9098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