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러리 동산에서 내려다본 제주시내 풍경. 양인석 씨에 따르면 1940년~1950년대만 해도 이곳에 오르면 제주읍성이 한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용이 날아가 버린 곳이라는 비룡못 전설유년시절 놀이터이자 주민들 삶의 현장제주읍성 한 눈에 볼 수 있는 부러리길고층 건물 건립 등 개발로 옛 풍경 잃어
골목을 누비다 보면 수많은 이들의 추억을 마주하게 된다.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진 것들이지만 누군가에겐 생생한 기억의 장소다. 골목의 이야기는 어쩌면 그러한 얘기들이 하나로 묶여 완성될는지도 모른다.
용담1동 비룡길에서 만난 이들은 '잃어버린 추억'을 얘기했다. 건물이 빼곡히 들어선 도심 한복판에서 떠올린 유년시절의 기억이다. 개발로 인해 잊혀져가는 옛 풍경의 아쉬움, 그 골목을 따라 걸었다.
#용담마을의 어제 오늘
제주시 용담1동은 두 개의 큰 물줄기 안에 자리하고 있다. 한천과 병문천이 바로 그것이다. 병문천은 한라산에서 발원해 삼도1동과 용담1동과의 경계를 이루면서 동한두기 바다와 만난다. 한내는 한라산에서 뻗어 나와 용연과 동·서한두기 사이의 바다와 이어진다. 둘 다 건천으로 지금은 상당 구간 복개돼 도로로 이용되고 있다.
'한내'라고도 불리는 한천 주변에는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아왔다. 용담동 지역의 고인돌이 한내에 많이 분포돼 있는 것만 봐도 짐작 가능하다. 그러다 조선 순조 27년(1827) 제주향교가 광양에서 지금의 용담1동에 옮겨오고 1920년을 전후로 제주읍성 밖으로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자연부락이 형성됐을 것으로 보인다. 2001년 발간된 용담동지에 따르면 한내와 병문내 하류에 있는 한두기가 용담동 지역에서 설촌 역사가 가장 오랜 곳이라고 전해진다.
#개발로 잊힌 생생한 기억
여느 곳처럼 마을은 변해왔다. 수많은 공간이 없어지고 생기기를 반복해 왔다. 그런 속에서도 옛날이야기처럼 전해지는 얘기들이 있다. '비룡못'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다.
새 도로명 주소로 하면 비룡길. 서문공설시장 맞은 편 골목이다. 이 일대는 '비룡못 동네'라고 불렸다. 비룡못이 있었다고 해서 불리던 이름이었다. 이름을 놓고는 주민들 기억이 엇갈리지만 '용이 날아가 버린 곳'이라고 해서 비룡못으로 불렸다고 전해진다.
용의 놀이터였다는 '용연', 용이 승천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용두암'이 관광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과는 달리 주민들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져온다. 골목 안에 숨은 또 다른 '용의 전설'이다.
비룡못은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겐 추억의 저장고다. 용담동에서 나고 자란 안차홍(54)씨게도 특별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꺼내놓을 때 빼놓을 수 없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비룡못에는 용천수가 솟아올랐어요. 어릴 적 친구들과 못 주변에서 잠자리를 잡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못 가운데는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었는데 징검다리를 놓고 건너가서 놀기도 했죠. 어머니들은 빨래를 하기도 하고. 그 곳에서 나는 물로 콩나물을 키워서 파는 가게도 있었지요." 안씨의 말이다.
용이 날아가 버린 곳이라는 전설이 전해지는 '비룡못 터'.
하지만 언제부턴가 물이 말라갔다. 주변에 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여 썩어갔다고 주민들은 전한다. 1970년대 비룡못이 매립돼 '비룡못 어린이 놀이터'로 만들어진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지금은 놀이터도 없어졌다. 놀이터 가운데로 도로가 나면서 어린이놀이터였음을 알리는 간판으로 간신히 비룡못 터를 확인할 수 있다.
"어릴 적 추억의 공간이 사라져 아쉬움이 크다"는 안씨는 "당시 비룡못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사진 한 장이 남아있지 않아 안타까움이 더한다"고 말했다. 비룡못 터 인근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그는 이러한 마음에 가게 이름에 '비룡'이란 글자를 담았다. 지금은 없어진 공간을 추억하기 위해서다.
#그곳에 오르면 읍성이 한눈에
비룡못 터에서 바닷가 방향으로 가다보면 '부러릿질(부러리길)'을 만날 수 있다. 제주 향교 북쪽, 동서로 난 옛날의 '구한질'을 말하는데 '부러리(동네)'를 지나는 길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용담동지에는 "'서문 밖'에서 '부러리', '정드르'를 거쳐 '대정골' 방면으로 빠지는 '웃선반질'로 이어졌던 한길"이라고 설명돼 있다. 1940~1950년대만 해도 제주시에서 서쪽으로 가는 사람은 이 길을 거쳐야 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너무 변했습니다. 옛날 골목 모습이 거의 남아있지를 않지요." 용담1동 토박이 양인석(82) 씨도 골목 안에서 세월의 흐름을 실감한다. 고층 건물이 들어서고 큰길이 나는 개발 물결 속에서 그는 나이를 먹어왔다. 옛 기억이 흐릿하지만 부러릿길에서 뛰놀던 기억만은 뚜렷하다.
"해 뜨고 달 뜨는 모습이 잘 보일 만큼 높은 지대였기 때문에 '부월리(부러리)'라고 불렸지요. 지금은 고층 빌딩에 막혀 바다도 잘 보이지 않지만 어릴 적 친구들과 놀면서 '부월리'에 올라서면 제주읍내를 한 눈에 볼 수 있었습니다." 양씨의 말처럼 부러리에서 볼 수 있던 제주의 풍경은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고층 건물 사이로 반쯤 모습을 드러낸 사라봉만이 내다보일 뿐이다.
지금은 잊힌 풍경이지만 이러한 골목 얘기가 없어지는 게 양 씨는 아쉽다. 부러리길은 새 주소로 비룡1·2길로 불리고 있다. 옛 지명이 사라진 것이다.
"주소가 바뀌면서 비룡길로 불리고 있지만 그곳은 부러리길입니다. 주소가 원래 지명과 다르게 잘못 만들어 진 거지요. 골목의 숨은 이야기가 점점 사라져 가는 것 같아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