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와 중국을 말하다]제1부 교류의 시작과 미래-②표류·표착을 통해 교류가 이뤄지다

[제주와 중국을 말하다]제1부 교류의 시작과 미래-②표류·표착을 통해 교류가 이뤄지다
다양한 문물 유입 통로… 동아시아 공동문화 축적
  • 입력 : 2014. 07.09(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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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곽이 잘 남아있는 소주성과 그 아래 성 안으로 연결된 운하. 최부는 이 운하를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윤형기자

제주 표착 외국인은 중국인이 가장 많아
제주서도 중국 표류…15C 말 최부 표해는 대표적
소중한 역사문화자원 재인식, 양 지역 교류·협력 절실

1997년 1월, 제주시 한경면 신창리 앞바다. 이곳 해저에서는 남송대의 도자기와 금팔찌, 금뒤꽂이 등이 다량 발견됐다. 이는 제주에서 대규모로 확인된 해저유물이라는 점에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출토 도자기는 녹갈색과 갈색유약이 시문된 청자대접편이 대부분이었다.

이 도자기를 실은 선박은 어디에서 왔을까. 도자기는 중국 절강성의 용천요에서 생산된 것으로 추정됐다. 선박은 중국 남부 절강성의 고대무역항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곳에서 나온 자기류 중에는 일본 규슈의 다자이후(大宰府) 유적에서 보이는 청자와 똑같은 유물이 있다. 제주도나 규슈지역을 기착지로 절강성을 출발한 선박이 신창리 앞바다에서 침몰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결국 제주도가 중국과 일본을 잇는 교역로상의 중간기지 역할을 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고대부터 주변지역과의 다양한 교류로 제주도에는 한반도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이면서도 동아시아 공동의 문화가 축적돼 있다. 고대부터 중국을 기점으로 하는 동방교역로를 통해 새로운 문물이 유입되기도 한다.

제주도는 섬이라는 지리적 격절성이 있지만 오히려 해류와 바람 등을 이용해서 다양한 지역과 교류하는 것이 가능했다. 혹은 뜻하지 않게 제주에 표착하거나 그 반대로 중국 등 주변지역으로 흘러들어가는 사례도 빈번했다.

특히 제주도에 표도한 중국인들은 대부분 절강성 영파부 소속 선박에 탑승한 사람들이다. 선박 파손이 심하지 않을 경우에는 제주도에서 수리한 후 바로 중국으로 보내지기도 했다. 제주도에 표착한 외국인은 중국인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한다. 반면에 제주도에서 중국에 표류한 경우도 있다.

그 중 조선시대 최부의 표류는 유명하다. 나주가 고향인 최부는 추쇄경차관으로 1487년 11월 1일 전라도 해남을 떠나 다음날 조천포구로 제주에 부임했다. 이듬해인 1488년 부친상을 당해 화북포구를 출발했으나 폭풍을 만나 13일 동안 표류한다.

사진 왼쪽부터 절강성 임해현의 최부 표해록 관련 기념비, 항주에 있는 혜인 고려사, 소주성 명대거리 근처의 대운하.

우여곡절 끝에 최부를 비롯 일행 43명은 절강성 임해현 우두외양에 표착한다. 이후 영파와 항주~소주~양주~덕주~북경 등 주요 도시를 거쳐 6개월 만에 귀국, 성종의 명으로 여정을 자세히 기록한다. 오늘날 3대 중국견문록의 하나로 꼽히는 최부표해록의 탄생 배경이다. 최부에게는 동방견문록을 남긴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여행가 마르코폴로에 비견해서 조선의 마르코폴로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최부는 중국 내륙을 대부분 경항대운하로 이동했다. 경항대운하는 항주 전당강에서 시작해 북경까지 이어진다. 최부는 장장 약 1800㎞의 고대 대운하 전구간을 따라 이동한 최초의 조선인이었다. 최부가 15세기 후반에 물길을 따라 이동했던 대운하는 오늘날에도 주요 물자를 운송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표해록에는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해바다의 정황, 중국 내 운하와 주변 풍광과 지역의 문물 등을 꼼꼼하게 기록해 놓았다. 송나라 때 고려 사신이 세웠다는 혜인고려사 등 우리나라와 관련된 사실들도 엿볼 수 있다.

최부의 표류는 제주를 중국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됐고, 중국의 다양한 문물을 국내에 소개하는 등 영향을 미쳤다. 최부는 중국을 여행하면서 수차를 제작하여 사용하는 것을 직접 보고 가뭄이 들자 수차를 만드는 법을 가르쳐 가뭄 극복에 도움을 주었다. 또한 운하를 만들면서 쌓은 제방과 수문 및 운하를 운행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해안방비와 정치제도, 도시, 민속 등을 자세히 기록함으로써 표해록의 가치를 높였다.

최부는 특히 강소성 소주와 절강성 항주에 큰 애착을 보였다. 소주와 항주는 물의 도시라고 할 정도로 호수와 강이 많다. 빼어난 경치로 '하늘에는 천국, 지상에는 소주와 항주'라고 표현할 정도이다.

15세기 후반 최부가 머물렀던 도시 항주와 소주에는 경항대운하를 따라 이동했던 여정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흔적들이 남아있다. 소주성과 대운하 및 명나라 시대의 자취를 간직하고 있는 명대거리, 항주의 대운하와 혜인고려사 등등 발자취를 느낄 수 있다. 또한 2005년 12월에는 최부표해록과 관련 중한민간우호비가 임해시 도저성에 세워졌다. 나주시 최부기념사업회와 임해현의 관계자들이 합심하여 세운 것이다.

뿐만 아니다. 한국인 최초의 신부이자 순교자인 김대건신부의 표착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8월 17일 상하이 진자샹(金家巷) 성당에서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조선 교구장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서품을 받는다. 김대건 신부는 국내로 귀국할 당시 폭풍우를 만나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포구로 표착한다. 긴자샹 성당 내에는 김대건 신부 유골이 모셔져 있고, 한국인들의 성지순례가 이어지고 있다. 또한 한경면 용수리 포구에는 김대건신부 표착 기념관이 조성돼 있어 많은 순례객들이 찾는 성소로 떠오르고 있다.

제주도에는 또 중국 진시황의 불로초를 캐기 위해 서귀포에 서불을 보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등 다양한 교류의 흔적이 남아있다.

이처럼 제주도와 중국간의 표류 표착은 양 지역의 문물 등을 소개하는 또 하나의 통로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흔적은 기존의 제주가 갖고 있는 자연경관에 더해 훌륭한 관광자원이 된다. 이는 제주와 중국과의 교류를 한 단계 높일 수 있는 소중한 역사문화자원으로 재인식돼야 하며, 미래지향적인 방향에서 활성화 방안 등을 찾아 나가야 할 것으로 지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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