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3)노섬 한국해수관상어종묘센터 대표

[제주를 이끌어온 선각자들](3)노섬 한국해수관상어종묘센터 대표
"제주는 양식하기 복 받은 땅… 해마타운 만들 것"
  • 입력 : 2016. 02.04(목) 00:00
  • 김지은 기자 jieun@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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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해수관상어종묘센터 노섬 대표가 센터에서 기르고 있는 클라운피시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노 대표는 지난 2000년부터 R&D 사업으로 해수관상어 종묘 생산 기술을 개발해 왔다. 강희만기자

국립수산진흥원서 한국 최초 전복 양식 기술 개발
1985년 제주대 교수로 부임해 넙치 대량 생산 성공
10여년 전 국내 처음으로 해수관상어 산업화 이룩

"제 이름에 섬(暹)이 해 돋을 섬입니다. 이곳에 온 건 어쩌면 운명인 것 같습니다." 지난달 30일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 한국해수관상어종묘센터에서 만난 노섬 대표가 말했다.

경상남도 합천 출신이지만 그는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제주에서 보냈다. 이곳에서의 삶은 제주 양식산업의 시작과 때를 같이 한다. 10여 년 전부터는 해수 관상어를 기르기 시작했다.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이었다. 올해로 일흔 셋, 그는 여전히 꿈꾸고 있다.

▶물고기 양식에 눈뜨다=어찌 보면 가난 때문이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은 생각하지 못했다. 노 대표는 "홀어머니 밑에서 대학에 가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며 "그래서 실업계인 수산고등학교 양식학과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1950년대, 인공적으로 물고기를 기른다는 것 자체가 낯선 시기였다. "당시 살던 어머니 고향 여수는 어항이었습니다. 배를 타면 물고기를 잡아 하루에 수 백 만원을 벌었지요. 그런데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으로 세계 추세가 바뀐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것처럼 물고기의 알을 부화시켜 길러서 상품으로 내놓는다면 재밌겠다 싶었어요."

생각지 않던 대학생활도 하게 됐다. 부경대학교의 전신인 수산대학교에서 전문적으로 양식을 공부했다. 대학을 졸업한 1967년부터는 국립수산진흥원(현 국립수산과학원)에서 연구자의 길을 걸었다. 함께 일하던 변충규 수산진흥원 여수분소장이 든든한 지원군이 됐다. 노 대표는 변 소장과 힘을 모아 김 사상체, 미역, 보리새우, 꽃게 양식 등을 연구했다.

노 대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전복 양식에 성공하기도 했다. 전복 산란기를 가을에서 봄으로 바꿔 전복양식을 산업화한 것이다. 말단 직원으로선 이례적으로 농수산부(현 농림수산부) 장관상인 우수연구상을 받았다. 1980년에는 여수에 생긴 수산진흥원 수산종묘배양장 초대 장장을 맡아 다른 지역 배양장에 양식 기술을 지도했다.

노섬 대표는 60년 가까이 양식을 전공하면서 우리나라 최초로 전복 양식을 성공해 냈다. 10여년 전부터는 국내에서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해수관상어를 길러내고 있다. 그 공을 인정 받아 2011년 농림수산식품부의 최우수 수산 신지식인으로 선정됐다.

▶제주에서의 삶=1985년, 그는 제주로 건너왔다. 수산진흥원에서 맺은 인연이 계기가 됐다. 노 대표는 "소장으로 모시던 변충규 선생이 제주대학교에 먼저 와 있었다"며 "함께 양식붐을 일으켜보자는 얘기에 제주대 해양과학대학 교수로 오게 됐다"고 했다.

여건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연구 시설도 마땅치 않았고, 당시 제주에는 양식장으로 정식 등록된 곳도 없었다. 서귀포 보목리에 있던 해양연구소를 연구 공간으로 삼아 복어, 넙치 등을 길러냈다. 제주에서 넙치 양식이 대규모로 시작된 것도 그때부터다. 1986년의 일이다.

"보목리에 장양수산이라고 있었습니다. 일본 기술자를 데려다 양식을 시도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우리가 먼저 알을 부화시켜 물고기를 기르고 있으니 찾아와 여러 가지 조언을 구했습니다. 어미가 알을 잘 낳지 않는다고요. 양식 기술을 지도해 줬고,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넙치를 대량 생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양식을 할수록 제주 섬의 가치가 눈에 들어왔다. 노 대표는 제주를 "복 받은 땅"이라고 했다. 특히 제주의 지하해수는 물고기를 기르는 데 '대단한 무기'라고 평가했다. 노 대표가 양식학회 등을 통해 제주를 '전략적 양식종묘기지'로 만들자고 제안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제주 지하해수는 연중 17도를 유지합니다. 바닷물이 13~14도까지 내려가는 겨울철에도 17도의 물을 쓸 수 있는 것이죠. 육지에서 이 정도 수온을 유지하려면 연료비 등 상당한 경비가 들어갑니다. 이와 달리 제주 용천수는 1년 내내 14도를 유지하지요. 제주는 온대성, 열대성, 냉수성 어류 모두를 키우기 좋은 곳입니다."

▶'니모 대부' 해마 타운을 꿈꾸다=2007년 대학 강단에선 물러났지만 그는 큰 과제를 안고 나왔다. 오전 5시에 일어나 자정이 될 때까지 일을 손에 놓지 않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간의 삶의 궤적은 발바닥의 굳은살로 남았다.

그는 교수로 재직하던 2000년부터 해수관상어 인공 양식에 돌입했다. "퇴임을 앞둔 1999년 한국관상어협회 원로들을 만났습니다. 우리나라 양식기술이 뛰어나다고 하는데 왜 해수관상어는 아무도 하지 않느냐는 말을 들었지요. 연간 100억원에 가까운 외화를 쓰면서 관상어를 수입하고 있다면서요. 곧바로 해양수산부에 가서 관상어 기술 개발 과제를 내면 지원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좋다고 하더군요. 여태껏 아무도 손대지 않은 아이템이었으니까요."

결과는 성공이었다. 그는 2004년 니모와 세들백, 마룬 등 클라운피시 3종의 생산 기술을 개발해 냈다. 같은 해 제주대에선 국내 처음으로 해수 관상어 양식 산업화를 위한 심포지엄이 열렸다. 전국 수족관의 눈이 자연히 그에게 쏠렸다. 2005년 사비를 털어 만든 해수관상어종묘센터에는 관상어 10종(클라운피시 8종·해마 2종), 60만 마리가 자라고 있다.

종묘 생산 기술은 독보적이다. 그는 "세계 16개국 28개 기업이 생산하는 해마의 평균 생산량이 1만2000마리인데, 센터에선 매달 5만마리가 생산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에선 그에게 기술 이전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는 3~4년 전부터 해마에 더 집중하고 있다. 거대한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2012년 중국에서 열린 국제 관상어 전시회에서 바이어를 만났습니다. 정말로 한국에서 해마를 만들 수 있느냐, 그렇다면 왜 관상어로만 기르느냐고 묻더군요. 전 세계 해마 생산량의 80%가 중국인의 입으로 들어가고 있는데 왜 10% 정도인 관상어 시장만 보느냐는 것이었지요. 중국 전통의약시장에서 해마가 차지하는 비중이 7조2000억원에 달합니다. 현재는 중국 정부가 해마 수출의 문을 열어주지 않고 있지만 그 문이 언제 열리느냐만 남아있습니다."

그는 또 다른 도전을 앞두고 있다. 센터 일대를 '해마 타운'으로 조성하는 것이다. 해마 종묘 생산 기술과 다른 산업을 연계한다면 제주의 성장 동력이 될 거라고 그는 내다본다.

"전 세계적으로 해마 타운은 없습니다. 센터에서 전시장을 마련해 해마를 기르는 것을 보여주고 이를 가공해 음식, 화장품, 의약품 등으로 만드는 것을 선보이려 합니다. 해마타운을 1차산업부터 6차산업까지 아우를 수 있는 융복합산업단지로 만들어 제주 관광과 연결시키는 꿈을 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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