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칼럼]공적(公的) 유물은 시민들이 공유해야

[한라칼럼]공적(公的) 유물은 시민들이 공유해야
  • 입력 : 2016. 06.14(화) 00:00
  • 편집부 기자 su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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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하기 전인 올해 초까지만 해도 시민복지타운 근린공원 주변을 종종 걸어 다니곤 했다. 차가 덜 다니는 곳이고 운동기구도 있어서 시간 보내기에 괜찮았기 때문이다. 시야가 트인 곳이어서 한라산자락의 아름다움도 즐길 수 있었다.

거기에 가는 즐거움이 또 있었는데, 그것은 '허멩이 문서'와 관련된 비(碑)를 보는 일이었다. 운동시설 남쪽에 주민들이 세운 4·3추모비가 있고 그 옆에 3기의 비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허명(許溟) 관련 비였다. 평소엔 무심코 지나치곤 했었는데, 어느 은사님이 일러줘서 확인해 보니 '목사허공명휼민청정비(牧使許公溟恤民淸政碑)'가 다른 이의 선정비·거사비와 함께 거기 있었던 것이다.

허명 목사가 어떻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맑은 정치를 펼쳤는지는 김석익의 '탐라기년'에 나와 있다. 1814년 제주목사 허명이 미역을 채취하면서 내는 잠녀(해녀)의 수세(水稅)를 폐지하고, 그 줄어든 세금을 자신의 돈 900여 냥을 내어 공용으로 보충했다는 것이다. 해녀들에게 부과되는 세금이 지나치다고 여겨 그걸 없애고, 그 세수 부족분을 사재(私財)로 충당했으니, 백성들은 크게 반겼다.

하지만 허명은 병을 얻어 부임 13개월 만에 제주를 떠나야 했다. 그의 약속은 더 이상 지켜질 수 없는 상황이 됐다. 그의 문서는 쓸모없어지고 말았다. 이후 백성들은 쓸모없이 되어버린 문서를 '허멩이 문서(허명의 문서)'라고 말하게 됐다. '제주어 사전'에도 그것이 '헤멩이 문서'와 함께 올라 있으면서, '아무 증거도 안 되고 소용도 없는 문서'로 풀이돼 있다.

이처럼 끝내 '허멩이 문서'가 되고 말았지만, 그 뜻은 숭고한 것이었다. 허명 목사의 애민 정신을 제주사람들은 잊지 않았다. '탐라기년'에는 백성들이 청백리의 덕이라 칭송하여 비를 세웠음이 기록되어 있다. 그 비가 바로 시민복지타운의 것이었다.

그 비는 원래 거기 있던 건 아니라고 한다. 인근에 있던 것을 도로 개설을 하면서 옮겨놓게 됐다는 것이다. 나는 그게 거기 있음을 안 뒤부터는 그 곁을 지나갈 때마다 퍽 안타까웠다. 허명 목사의 선정에 대해 대부분의 시민들이 모른 채 지나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루빨리 안내판이 세워져서 오가는 이들에게 미담을 알렸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작년 5월 8일, 그곳을 거닐다가 깜짝 놀랐다. 그 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양 옆의 다른 두 비는 그대로 있고, 가운데의 그것만 사라진 것이었다. 비가 있던 자리의 흙을 보니 며칠 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중에 그 비의 행방은 확인됐다. 후손임을 자처하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운영하는 체험농원에 옮겨놓았다는 것이다. 제주시청에서는 그것이 등록된 문화재가 아니라며 확실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몇몇 뜻있는 분들의 문제 제기가 이어지자 관계 부서에서는 해녀박물관으로 옮길 수 있도록 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다.

'목사허공명휼민청정비'는 공적(公的) 유물이다. 후손이 계속 관리해오던 것이라면 문제가 다르지만, 공원에 있었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사유지로 옮겨가선 안 된다. 빨리 제자리로 돌려놓고, 안내판을 설치함으로써 시민들의 그 뜻을 되새기도록 해야 한다. 특히 도로 건너에 정부합동청사가 있으므로, 산책길의 공무원들이 공직자의 거울로 삼도록 했으면 좋겠다. <김동윤 제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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