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시작하며]산정유감(山情有感)

[하루를 시작하며]산정유감(山情有感)
  • 입력 : 2016. 10.26(수) 00:00
  • 편집부 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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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의 생명력이 몸살을 앓기 시작하면서부터 일각에선 물적 가치가 아닌, 그 존중에 대한 논의가 한라산예약제와 함께 심심찮게 오르내리고 있다. 그중 하나는 때늦은 감이 있지만 지난 6월에 개최됐던 한라산의 인문학적 가치를 논하는 학술심포지엄 '제주의 자존, 한라산을 말하다'에서 모 단체의 대표로 참석한 토론자가 "각종 연구 결과들이 연구자만을 위한 자료에 멈춰 있기 때문에 설문대할망이 옥황상제의 셋째 딸이라는 왜곡된 정보들이 관광 해설사 등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고 지적한 것도 있었다.

문제는 '제주민속연구소, 진성기'의 제주도 전설집 '신화와 전설'에는 '설문대할망은 옥황상제의 말잣딸이었다. 할망은 워낙 호기심도 많고 활달한 성격이라 천상계에서의 생활이 무료하고 갑갑했다. 게다가 거대한 몸집과 힘을 지닌 할망이 상제의 시중만 들자니 병이 날 지경이었다'란 대목이 나온다. 이것이 어떻게 '왜곡된 정보'라 하는지, 어떤 근거로 한 발언인지 제주도의 학계문화를 주도하는 단체 대표로서 쉽게 내뱉을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대 제주인들의 동양적 사관에 비추어 본다면 '옥황상제'란 우주의 주재자로 '주역'에서는 건천(乾天)에 해당되며 천·지·인 삼재(三才)를 대표하는 주체를 뜻하고, 말잣딸은 딸 셋을 기준으로 끝 말(末)자에 순서를 뜻하는 셋째 딸로 태택(兌澤)에 해당되며, 그 어원을 풀면 왕성한 양기가 음기로 변화된 형태로, 연못이 만물을 온화하게 감싸는 모습(물에 둘러싸인 지구)을 상징 '의역동원 역경, 주춘재', 연못(口)의 수증기가 피어오르듯이 사람(人, 八)의 입김(숨결, 口)이 토해지는 모습으로 음기운이 밖으로 발산된다는 뜻으로, 태(兌)는 음(陰)이 양(陽)들보다 위에 처하여 맏이(兄) 노릇을 하며 기뻐하는 괘상을 뜻한다 '대산주역강의, 김석진'. 후천 가족사회로 보면 셋째 딸에 해당되지만 선천 기운으로는 건천 다음에 위치한다. 경쟁 위주의 서양적 시각으로는 순서가 곧 '신분 위치의 높낮이'를 재는 척도를 의미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전체를 아우르는 동양적 시각으로 보는 순서는 곧 '완성되어가는 단계'를 뜻하는 게 다반사다. 이유 있는 숫자 삼의 합은 '기본이 되었다', '살아있다', '살아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삼신산이다. 세 번을 다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안정된 자리에 이른다.

신화에서 '산'은 '땅'의 배꼽으로 천지창조가 시작되는, 하늘과 땅을 잇는 기둥으로 표현된다. 설문대할망은 옥황상제(하늘의 주재자, 乾)의 셋째 딸(3절을 이루어 낳은, 형체가 갖추어진 생명력이 왕성한 딸, 兌 괘)인 한라산의 정기신(精氣神) 삼합을 이룬 신체다. 필자는 '설문대'의 어원을 신을 뜻하는 고대어 '사/살', 만들다(망/맹갈다)의 어근 '망/맹', 그리고 주체자를 뜻하는 '닥/닥+l'(道/都/또)를 쓴 말로 살망닥/또→설망되→설문대 변천과정으로 추정한다. 그 신체를 중심으로 구구절절(3배수, 오름과 계곡)을 이루며 사해로 뻗어나간 것이 제주도다. 제주섬의 만물은 한라산 '설문대할망 치마폭' 슬하에 있다.

촉망받는 사회단체 대표의 발언은 제주도를 아끼는 마음에 설문대할망의 위상을 드높이려다 실수한 것으로 보이지만 '삼고초려'하는 보다 깊은 통찰이 선행되어야 했다. 한라산 산신제를 주도해야하는 제관으로서 종교를 핑계로 끝내 서지 않는 도지사의 행보가, 미흡한 연구자료 덕분에 경쟁자 없이 독보적 존재로 군림하려는 일부 강단학자들의 관성적 발언이, 미친 자본주의 시장의 바람 앞에 섣불리 내놓은 '위대한 제주의 얼'인 신화들을 마치 '보호막도 없이 초라하게 자기 땅에 유배된 사람들'처럼 제주신화역사공원의 한 귀퉁이에 세워두게 될 것을 생각하면 할수록 만시지탄 할 일이다. <고춘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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