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참 맛있게 마시는 여류시인을 알고 있다. 한 번도 그녀와 커피를 마신 적은 없지만 필자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그녀보다 더 맛있게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으리라고. 그녀의 시 '헤이즐넛 커피를 마시며'를 읽던 해가 2005년 무렵이 아닌가 한다. 그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저마다의 빛깔로 음정을 맞추듯 / 빛 고운 화음으로 노래를 부른다 / 조금 떨림 소리 / 솔 /
하늘에 별이 보이고 // 아버지 숨결 같은 / 레 / 바다 내음이 난다 / 새처럼 훨훨 날고 싶은/ 내 욕망의 소리엔 / 어떤 음이 날까? -서현미의 '헤이즐넛 커피를 마시며' 중에서
그녀는 커피에서 음악을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하늘의 별을 보기도 하고 아버지의 숨결과 바다내음을 맡기도 한다. 이 정도의 경지라면 그야말로 커피의 달인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커피 한 잔에 이렇게 다양한 소리와 빛깔과 내음이 있다는 것을 필자는 그녀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커피를 좋아하는 시인으로는 '가을의 기도'로 널리 알려진 김현승(1913~1975)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김현승은 커피중독자라 여겨질 만큼 커피를 좋아했다고 한다. 그의 호 다형(茶兄)도 커피를 사랑한 데서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시인 김현승은 제주도와도 인연이 있다. 목사였던 부친이 제주도에 와서 목회활동을 했던 관계로 제주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 후 광주로 가서 청소년기를 보내었는데 서양선교사들이 그의 집을 자주 찾았다고 한다. 그때 커피를 조금씩 얻어 마신 것이 커피를 평생 사랑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그에게는 특이한 습관이 있었는데 매일 아침 집 근처 다방으로 가서 그가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면서 명상에 잠기고 고독을 즐겼다고 한다. 그의 시에 유독 가을이 많이 등장하는 것도 가을이 고독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는 계절이고 커피를 가장 맛있게 마실 수 있는 계절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라 한다.
박목월의 시에도 커피가 많이 등장하는데 한 가지 심상이 필자의 뇌리에 강렬하게 각인되어 있다. 제목은 잊었지만 원고마감에 쫓겨 다락방에서 밤새워 원고를 쓰다가 한 잔의 커피로 졸음과 피곤을 쫓는 심상이다. 아마 당시 목월의 사정으로 보아 별로 고급 커피는 아니었을 것이다. 인스턴트커피 한 스푼에 설탕 두어 스푼을 넣어 대충 휘저은 것일 것이다. 하지만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난한 시인에게 그 한 잔의 커피가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까.
필자 역시 커피를 좋아한다. 하루에 다섯 잔 정도는 마시는 셈인데 솔직히 말하면 아직 제대로 맛을 모른다. 일하다가 잠깐 쉬고 싶을 때가 있을 것이다. 이때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라면 슬그머니 사무실 바깥으로 나가 이런저런 생각들을 담배 연기에 실어 날려보낼 것이다. 필자의 커피 애호도 이런 수준이다. 일하는 틈틈이 무료함을 달래주는 수준. 좋아하는 커피도 단순하다. 흔히 잔치집 커피라 부르는 커피 믹스다. 그 속에 들어있는 너무 많은 양의 설탕이 몸에 해롭다고 해서 요즘은 아내가 원두커피를 끓여주는데 달달한 맛에 길들여진 탓인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날씨가 꽤 쌀쌀해졌다. 시국도 어수선하다. 김현승처럼 고독을 뼈저리게 느끼며 명상하는 수준은 아닐지라도 한 잔의 커피를 마시면서 나와 주변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너무 욕심이 과한 건 아닐까. 혹 내려올 때를 놓치는 건 아닐까. <권재효 지속가능환경센터 사무처장·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