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4·3 70주년 아픔을 넘어 미래로-4 / 제1부 4·3의 현주소] (3)외면받는 수형자들

[제주4·3 70주년 아픔을 넘어 미래로-4 / 제1부 4·3의 현주소] (3)외면받는 수형자들
불법 군사재판으로 죄인 굴레… 70년간 고통 시달려
  • 입력 : 2018. 02.20(화) 20:00
  • 송은범 기자 seb1119@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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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평화공원 제단 뒤편에 행방불명인 표석 3800여기가 모셔진 행방불명인 묘역. 이 곳에 세워진 표석 대부분은 제주4·3 당시 재판을 받은 수형인이거나 한국전쟁 이후 예비검속 때 희생된 사람들의 것이다. 강경민기자

도민 총 2530명 유죄판결
현재 수형생존자 30여명
“명예회복 등 조치 있어야”

지난해 4월 19일, 제주지방법원엔 70년 동안이나 원통함 속에 살아온 4·3수형인들의 재심청구서가 제출됐다. 수형인들은 영문도 모른 채 불법 재판으로 옥살이를 하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고통을 겪었다. 이들의 호소는 절절했다.

"조사과정에서 받은 고문으로 상체를 바로 세울 수가 없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이지만 제대로 문제가 해결돼서 죄인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됐던 정 모(95·당시 27세) 할아버지)

"아기 업고 다니다가 이유 없이 잡혀가서 아무 설명도 없이 배에 태워져 가던 중 아기가 죽고, 그 죽은 아기를 목포 길거리에 두고 온 생각만 하면 지금도 마음이 너무 아프다."(징역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한 오 모(92·당시 25세) 할머니)

"조사받으면서 당한 고문으로 손가락이 다 꺾어지고, 어린 아들은 고아원에 맡겨져서 병들어 죽고 말았다. 하소연 할 데도 없었고, 어디가서 억울하다 말도 못했다."(징역 1년을 선고받고 전주형무소에서 복역한 한 모(95·당시 27세) 할머니)

"딸이 서울에 있는데, 법학과 나와서 법률 관계로 취직하게 됐는데 신분조회 하니까 내 기록이 나와서 채용이 안됐다. 그때는 기가 막히더라."(징역 5년을 선고받고 인천형무소에서 복역한 현 모(86·당시 16세)할아버지)

꽃다운 나이에 끌려가 옥살이를 했던 이들은 이제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됐다. 거동조차 힘들지만 죽기 전에 명예를 회복하겠다는 마음이 이들을 소송에 나서게 했다. 도대체 70년 전 제주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고문도 모자라 재판도 불법=제주시 건입동에 위치한 주정공장 옛터는 제주4·3 당시 귀순한 사람들을 수용하던 곳이었다. 수용된 이들은 토벌대의 무차별 초토화작전 때 중산간에 산다는 이유로 잡혀가거나, 학살당할까 두려워 숨어 지내다 귀순한 민간인이 대부분이다. 이 주정공장에서 경찰은 갖은 고문을 했고, 이후 수용자들은 불법재판을 통해 전국 각지 형무소에 분산 수감됐다. 인근 사라봉이나 정뜨르 비행장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한 경우도 많았다.

당시 군법회의는 1948년 12월과 1949년 7월 2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군법회의에서 재판을 받은 제주도민은 2530명이다. 아울러 일반재판에 의한 수형인도 1306명에 달한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형무소에서 학살되거나 행방불명됐다.

재판은 불법적으로 진행됐다. 당시 군법회의 관련 재판을 입증할 증인진술서나 공판조서, 판결문 등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 현재 유일한 자료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새정치국민회의 제주4·3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 부위원장이던 지난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발견한 '군법회의 수형인명부'가 전부다.

전문가들은 이 수형인명부마저도 당시 군에서 제주지방검찰청으로 하여금 형식적이나마 군법회의가 열렸다는 것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지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대부분의 수형생존자들도 당시 재판을 받은 기억이 없고, 형무소에 도착해서야 자신의 형량을 알 수 있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정부가 발간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는 "민간인 대상 군법회의에서 총 2530명이 유죄를 선고 받았고, 사형과 무기징역형만 하더라도 각각 384명, 305명으로 단일 사건으로는 사법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재판인데도 불구 국회·정부 등에서 논의되지 않았고, 신문에도 전혀 보도된 바가 없었다는 점은 의문이다"고 밝혔다. 이어 "이는 군법회의를 주관한 제주도계엄지구사령부와 제2연대가 재판을 실행하지 않았거나 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형식적 재판으로 일관했다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고 설명했다. 현재 4·3수형생존자는 30여명 밖에 남아있지 않다.

▶70년 만에 '재심' 청구=그렇게 70여년이 흘렀다. 이대로 억울한 죽음과 고통이 묻혀버리나 싶었지만, 수형생존인 18명이 '4·3수형희생자 불법 군사재판 재심'을 청구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다. 이들은 이날 "수형 피해자들은 불법 군사재판으로 억울한 옥고를 치르고, 이후에도 연좌제 등으로 인해 고통으로 일생을 살아왔다"며 "당시 '국방경비법'이 정한 소정의 절차마저 무시한 군사명령에 의해 벌어진 '군법회의'야말로 초사법적 국가범죄"라고 성토했다. 제주지방법원은 지난 5일 재심 개시 여부를 가리기 위한 첫 심리를 진행했다.

군사재판의 불법성은 정부 4·3진상보고서에서도 법률이 정한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았다고 분명히 하고 있다. 박상기 법무부장관도 지난 7일 국회에서 당시 군사재판에 대해 "기록이 없어 자세한 과정을 파악하기 어렵고 중대한 적법절차를 위반한 대단히 문제가 있는 과정이라고 본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당시 수형인에 대한 명예회복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수형인에 대한 명예회복 조치는 당연히 이뤄져야 한다. 그동안 수형인들은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 과정에서 사실상 소외돼 왔다. 더 늦기 전에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구제조치가 필요하다. 이는 4·3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도 반드시 이뤄져야 하는 일이다.

자문위원=문성윤 변호사, 박명림 연세대교수, 박찬식 제주학센터장, 양윤경 4·3유족회장

/특별취재팀=이윤형 선임기자, 표성준 차장, 송은범 기자

[인터뷰/ 억울한 옥살이 양근방 할아버지] "90세 눈앞… 명예회복 이뤄져야"

"오른쪽 허벅지에 총을 맞고 엎드려 죽은 척했지. 이후 토벌대가 사라지자 둘째형님을 찾아보니 가슴에 두 방, 팔에 한 방 총을 맞아 죽어 있었고, 그 조금 더 밑에는 사촌이 죽고, 또 그 밑에는 동네 청년들이 죽어 있었어. 이날 10명 정도 죽었지." 양근방(85·사진) 할아버지가 15살이던 1948년 12월 20일에 벌어진 일이다.

조천읍 와산리에 살던 양 할아버지는 4·3 당시 토벌대에 의해 마을이 불타고, 주민들이 학살되자 큰형님과 둘째형님을 포함한 마을주민 30여명과 동굴과 숲 등에서 피신생활을 했다. 하지만 먹을 것이 마땅치 않아 식량을 구하기 위해 마을을 몰래 찾았다가 토벌대에 발각됐다.

"큰형님과 함께 시신을 수습하고 곧장 대흘국민학교로 갔지. 둘째형님 부인, 즉 형수님이 끌려갔거든. 가봤더니 복부에 총구멍이 대 여섯 개 있는 상태로 다른 시신들과 나란히 누워 있더라고. 곧장 가지를 꺾어 단까(‘들 것’의 일본식 표현)를 만들어 형수님을 와산으로 옮겨 묻어줬지. 그날 비가 엄청 많이 왔어."

양 할아버지는 산에서 넉 달 정도 피신생활을 이어갔지만, 결국 버티지 못하고 1949년 4월 해안마을인 함덕으로 내려가 헌병대에 귀순해 주정공장에서 수용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같은해 7월 5일 열린 군법회의에서 징역 7년형을 받았다. '수형인 명부'에 따르면 당시 양 할아버지는 무죄를 주장했으나 유죄판결을 받았다고 기록돼 있다. 하지만 양 할아버지는 재판을 받은 기억이 없고, 제주항에서 배를 타 인천형무소에 도착해서야 징역형을 선고받은 사실을 알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인천형무소가 인민군에 의해 문이 열렸다. 양 할아버지는 곧바로 고향 제주로 가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그러나 대전에서 군 검문에 걸려 처형 위기에 처한다.

"50명을 골짜기에 데려가 총질을 하는데 나도 복부를 맞아 기절했지. 몇 시간 후 눈을 떠보니 나 빼고 다 죽었더라고. 아무도 없는 깊은 골짜기에서 50명의 시체를 보는 건 차마 말로는 표현을 못하겠어."

목숨은 건졌지만, 결국 1956년 재검속으로 인해 다시 형무소로 끌려갔다. 이후 1962년이 돼서야 석방됐다.

15살 소년은 30세의 청년이 돼버렸다. 제주로 돌아와 결혼을 하고 6남매를 낳아 키웠지만 '4·3수형인', '빨갱이'라는 꼬리표로 인해 하루가 멀다 하고 경찰서와 검찰청에 끌려 다녀야 했다. 연좌제로 인해 자식들은 군대를 갈 수 없었고, 취업에도 불이익을 받아야 했다.

"한날한시에 눈 앞에서 가족이 죽는 모습을 봤고, 총을 맞고도 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한 것이 너무 억울해. 이제 90살을 앞두고 있지만, 명예회복만큼은 반드시 이뤄졌으면 좋겠어."

<특별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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