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세상] 투명해져가는 몸, 빛을 잃고 시드는 인생

[책세상] 투명해져가는 몸, 빛을 잃고 시드는 인생
제주 장이지 시인 신작 시집 '레몬옐로'
  • 입력 : 2018. 06.29(금)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어느 시절 골목길, 저녁 날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굽은등을 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자취방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신문이나 방송 같은 전통 미디어가 애써 소식을 전하지 않더라도 웹이나 모바일로 지구가 하나로 연결되는 이즈음에 그런 풍경들은 종종 제 빛깔을 잃은 채 흑백화면으로 처리되어 버린다.

제주대 국문과 교수로 있는 장이지 시인의 신작 시집 '레몬옐로'는 '사회적 신체'가 바뀌어가는 현실 속에서 더 이상 자명하지 않은 우리의 존재를 더듬는 시들로 문을 연다. 장대비가 내리던 날 창문에 비친 빛을 레몬옐로로 부르며 이 땅에 내려앉은 이야기에 눈길을 뒀다.

'컴퓨터 모니터가 켜져 있고/ 나는 없다./ 나는 성기사와 싸우는 중이다./ 말하자면 나는 키메라다./ 사람이라면 이렇게 외로울 리 없다고/ 내 친구는 위서(僞書)처럼 서러운 말을 했다.'('키메라-유령' 부분)

스마트폰은 갖가지 일상을 처리해주는 기기다. 웹에 접속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무한의 공간으로 진입한다. 원하지 않아도 온갖 정보가 빛을 타고 흘러든다. 그 손바닥만한 공간 안에서 입을 것과 먹을 것을 불러주고, 낯선 여행지로 데려다준다.

하지만 그 평평한 세계 안에 환하게 켜진 정보들은 내 생각들을 '공산품'으로 만든다. 그 세계에서 벗어나면 가혹한 나날이 어린 청춘들을 기다린다. 등에 낙서가 붙고, 교과서가 찢어지고, 사물함에는 오물이 들어 있는 교실('카스트'), 친누나와 함께 살다 서른 살에 자살한 내 친구('어느 날 치모'), 눈이 큰 아이가 삥을 뜯고 있는 골목('중2의 세계에서는 지금'), 통장 잔고가 십오만원인 서른세 살의 무명 배우('페르소나')가 있다.

'빛을 잃고 시들어가는 인생들'은그들에게만 걸리지 않는다. 제주4·3에서 세월호까지 믿을 수 없는 일을 당해온 이들이 산다. 시집 군데군데 마르지 않는 눈물, 울음이 보이는 건 그 때문이리라.

'레몬옐로'의 끝은 발문이 달리는 여느 시집과 달리 웹처럼 링크를 걸어놓았다. 어째서 '개복치를 살려라'는 시를 짓게 되었는지, 시집에 텔레비전이란 말이 왜 가장 많이 쓰였는지 등 시어나 제목에 얽힌 사연을 풀어내 덧붙였다. 문학동네시인선으로 나왔다. 8000원. 진선희기자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946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