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11)예법과 예교

[심규호의 구라오(古老)한 대국] (11)예법과 예교
문명 소양 반복 강조… 과연 지금의 모습 어떻길래
  • 입력 : 2019. 05.30(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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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제도에 따르면, "천자가 아니면 예악을 제정할 수 없고, 상대부가 아니면 제도를 만들 수 없다(非天子不制禮樂,非上大夫不擬制度)." 천자의 권위는 자신이 예악의 모범이 되어 예악으로 문화를 창도하는 일이다. 이를 일러 덕치德治라고 한다. 중국 최초의 산문집이자 상고시대 역사, 정치문헌인 '서경書經' '주서周書·강고康誥'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그대의 크게 빛나는 선고先考이신 문왕은 능히 덕을 밝히시고 형벌에 신중하셨다." '명덕신벌明德愼罰'이란 말의 출처이다. 문왕을 추존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령(政令)으로 인도하고 형벌로 규범화하면 백성들이 형벌만 모면하려고 하고 부끄러움이 없어진다. 그러나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규범화하면 부끄러움을 알고 자율적으로 도덕을 지키게 된다."('위정爲政')

"덕으로 인도하고 예로 규범화"
실상 창고 가득해야 예절 알아
비례에 시비걸다 쫓겨난 공자


명쾌하다. 임금은 덕과 예로 다스리고 백성들은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알아 스스로 절제할 줄 아는 격조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과연 그러한 적이 있기는 했던가? 오히려 "창고가 가득해야 예절을 알고, 먹고 입는 것이 풍족해야 영예와 치욕을 안다(倉름實則知禮節,衣食足則知榮辱)."('관자管子·목민牧民')는 말이 좀 더 솔직하다. 배불리 먹고 따스하게 입을 수 있는 소강小康의 세상이 아직 요원한데 덕치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공자의 주유열국 상상도.

공자도 알고 있었다. 예악이 이미 붕괴되어 허례허식虛禮虛飾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논어·팔일八佾'에 보면, 노나라 대부 계손씨(季孫氏, 계평자季平子)가 자신의 집 뜰에서 팔일무를 춤추게 했다. '일佾'은 악무樂舞의 행렬을 말하는데, 한 줄 8명을 일일一佾이라고 한다. '일'은 아무나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주례에 따르면, 천자는 팔일八佾, 즉 8명씩 여덟 줄로 전체 64명이 춤을 추었고, 제후는 육일六佾로 48명(또는 36명), 대부는 사일四佾로 32명(또는 16명), 사는 이일二佾로 16명(또는 4명)이 대열을 맞춰 춤을 추었다. 대부인 계손씨가 공공연하게 천자의 예의禮儀에 따라 팔일무를 추도록 했으니 참월僭越이다.

제환공 칭패 연환화(連環畵).

공자는 분노했다. "이를 차마 참는다면 무엇인들 차마 참지 못하겠느냐." 쉰 살이 조금 넘어 제후 신분인 노나라 정공定公의 대사구大司寇(지금의 법무장관)를 맡은 공자는 당시 실권자인 삼환三桓(계손씨, 숙손씨, 맹손씨)의 비례非禮에 시비를 따지다가 결국 재임용에서 탈락하여 2년을 못 채우고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말이 주유천하이지 실상은 국외추방이다.

당시 천하는 예악으로 덕치를 펼치는 천자의 세상이 아니라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 등 강력한 국력을 지닌 오패五패가 호령하고 있었다. 말로는 존왕양이尊王攘夷를 부르짖었지만 그들의 관심은 온통 부국강병에 있었다. 전국시대로 넘어오면서 오패에서 칠웅七雄으로 바뀌었을 뿐 왕도가 아닌 패도覇道가 횡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이에 맞는 사상과 체계가 마련되었으니, 한비자韓非子가 집대성한 법가의 출현이다. 물론 공자 이후 맹자, 특히 순자는 자신의 저서에 '예론'과 '악론'을 마련하여 예악을 교화의 수단이자 치도의 이념으로 삼고자 했으며, 기존의 예악보다 훨씬 강제성을 지닌 행위준칙이자 도덕규범으로 예법禮法(예의와 법도)을 제시했다. 그의 문하에서 한비자가 나온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역시 덕치를 중시하는 왕도의 예악론을 기반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법치와 다르다.

공자 탄신 2555주년 석존제(釋尊祭) 팔일무.

주지하다시피 진나라는 법가의 사상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았는데, 한나라는 단명한 진 왕조를 반면의 교사로 삼아 유가를 전면에 내세우는 한편 법가의 사상을 활용한 통치방식을 겸했다. 밖으로는 유가의 덕치, 안으로는 법가의 법치를 국가 통치의 양대 핵심으로 삼았다는 뜻이다. 이는 청나라 말기까지 그대로 이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예악은 주나라 전통의 계승이자 유가의 상징으로 간주되어 통일제국의 중요 통치수단으로 활용되었다. 황제는 '과인寡人'이나 '고孤', '짐朕' 등 예전에 제후국이나 작은 나라의 군주가 쓰던 칭호로 자신을 겸칭했지만 세상 그 누구도 황제를 그저 평범하고 작은 인물로 보지 않았으며, 사람들마다 겸손을 미덕으로 보았지만 그 안에 자리한 비굴은 생각하지 않았다.

시대마다 예의를 강조했지만
정반대인 경우 비일비재 했다
새 시대의 예의범절은 어떤가


문득 공자의 말이 생각난다. "사람이 어질지 않은데 예가 무슨 소용이고, 사람이 어질지 않은데 악을 어디에 사용하겠느냐(人而不仁如禮何, 人而不仁如樂何)."('팔일') 본심과 달리 얼굴빛이나 거동만 예에 적합한들 무슨 소용이며, 조화로운 마음과 안온한 생각이 없다면 제아무리 정중하고 화려한 음악인들 무슨 감동을 줄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진晉나라를 통치한 사마씨司馬氏는 아예 예교禮敎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았다. 명분을 중시한다고 하여 명교名敎라고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조조의 후손들이 세운 조씨 정권을 선양禪讓이란 명분으로 탈취했다. 충효를 적극 중시했으나 자신들이 이미 예교에서 한참 벗어났다. 그래서 동시대 죽림칠현의 혜강이나 완적 등은 "명교를 뛰어넘어 자연에 맡긴다(越名?而任自然)."는 말로 사마씨가 주장하는 명교의 허상을 비판했다.

죽림칠현 화상석.

"위진 시대는 예교를 신봉한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주 괜찮은 것 같지만 실은 예교를 파괴했고, 예교를 믿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예교를 파괴한 사람들이 실제로 오히려 예교를 인정하고 예교를 지나치게 믿었다. 왜냐하면 위진시대에 이른바 예교를 신봉한다는 것은 이를 이용하여 사리를 채우기 위한 것이며, 신봉도 우연히 신봉한 데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루쉰은 '위진풍도 및 문장과 약, 술의 관계'에서 이렇게 말했다. 동시대 사람 우위吳虞는 '식인과 예교'라는 글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는 명백히 알아야 한다.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바로 예교를 중시함이고, 예교를 중시하는 것이 바로 사람을 잡아먹는 일이다." 이렇듯 예의는 시대마다 공히 강조되었으나 실상은 정반대인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2012년 중국공산당 제18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식 사회주의의 새로운 가치관으로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이 채택되었다. 국가, 사회, 개인의 가치관으로 대별되며 전체 12가지(부강, 민주, 문명, 조화 / 자유, 평등, 공정, 법치 / 애국, 경업敬業, 성신誠信, 우선友善)로 이루어져 있다. 문명국에 적합한 민주적이고 조화로운 강대국을 만들고, 자유와 평등이 넘치는 공정한 법치사회를 만들며, 국민은 애국하고 직업에 자부심을 지니며 성실하고 신뢰를 바탕으로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자는 뜻이다. 중국 도처에 관련 표어가 붙어 있어 어느 쪽을 보아도 눈에 띈다. 대회 보고서는 전면적인 소강사회小康社會 건설을 목표로 삼겠다는 말과 함께 결의에 찬 목소리로 강조했다. "문화 소프트파워를 현저하게 증강시키고, 사회주의 핵심 가치체계를 마음속에 깊이 담아 공민公民(국민)의 문명 소양과 사회주의 문명 정도를 현저하게 향상시킨다." 새로운 시대의 예의범절이자 문화의식이다.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을 체화하여 문명 소양과 사회주의 문명을 크게 향상시키자'는 말이 도드라진다. 국민 개개인의 문화적 소양이 높을수록 사회 수준이 높아지기 마련이니 당연하다. 그렇다면 현재 중국인의 문화적 소양이 어떠하기에 이토록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일까? <심규호·제주국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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