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준 작/고재만 그림
8-2. 기회는 날개가 달렸다.
유리창 너머의 베이징 하늘은 구름과 황사먼지에 뒤덮여 세상이 온통 희뿌옇다. 금산은 높은 빌딩 사무실 의자에 앉아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 볼 때마다 희열을 느꼈다. 장난감 블록을 쌓아 놓은 듯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건물들을 보면서 마치 그들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인 듯한 착각이 들었다.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는 덕분으로 어제도 전세기 넉 대를 한국의 제주도로 띄웠다.
한국에서는 몇 개의 자회사를 거느린 대룡그룹의 회장이지만 랴오닝 그룹에선 일개 이사에 불과했다. 더 높은 곳으로 날아가고픈 욕망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금산을 옭죄는 건 초조감이었다. 욕망의 기대심리는 언제나 불안감을 동반했다.
삽화=고재만 화백
테이블 위에 둔 휴대전화가 울렸다. 액정에는 매제라는 이름이 떴다. 장종필이었다.
그는 전화를 받자마자 제주에서 사업상 의논할 일이 있으니 급히 만나자고 했다.
"급한 일이라니? 나한테 무슨 도움이 되는 거야?"
"그럼. 네가 해보지 않은 큰 건수가 생겼어. 남들이 손쓰기 전에 빨리 결정해야 해."
리화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장석규는 노발대발 난리 쳤다
'종자 버렸다' '집안 망신이다' '중국 며느리 해서 선거 끝났다'
주변에 떠들고 다니는 별별 소리가 금산의 귀에까지 들렸다
큰 건수가 도대체 뭘까? 기대를 걸며 금산은 미리 약속한 일정들을 미루고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공항에 내려 종필에게 전화했는데 보안 사항이라 비밀리에 회사 사무실에서 보자고 했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대룡의 직원 김 기사가 승용차를 신시가지로 몰았다.
시내에 들어섰는데 갑자기 차가 멈추면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차창을 열었더니 도로를 점령하고 제멋대로 횡단하는 중국인 관광객들이었다. 금산은 자신이 보낸 고객들이란 생각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인동종합건설이란 이름이 큼지막하게 박힌 빌딩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사장실이 있는 F층에 내렸다. 음각의 그림이 화려하게 조각된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 기다리고 있던 종필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 와. 잠깐만."
김 기사는 들고 온 선물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는 꾸벅 인사하고 나갔다.
종필은 인터폰을 들어 어디론가 금산의 도착을 알린 후에야 금산에게 손을 내밀었다.
"먼길 오느라 수고했어. 얼굴 좋아졌는데? 신혼 재미 좋은가 보지?"
"친구 만나러 온 게 아니고 비즈니스 하러 왔거든."
"야, 임마. 친구가 아니라 이젠 한 가족이지. 처남, 매부."
"그렇지. 헌데 그 집안은 쌍놈의 집안인가? 형님한테 임마라니?"
금산의 말에 종필이 머쓱해 하며 쏙 기어 들어갔다.
"어 그렇게 되나?"
"그럼 임마."
"임마?"
"난 그렇게 말해도 돼. 형님이니까 임마."
처남, 매부가 서로를 보며 웃는데 노크 소리가 났다.
여직원이 들어와서 노란 밀감 주스가 든 투명한 유리잔을 탁자 위에 놓고 나갔다.
종필이 유리잔을 들고 은근히 금산을 바라보았다.
"고마워. 자네 도움 아니었으면 결혼 성사 안 되었을 거야."
금산도 주스 잔을 들고 한 모금 들이킨 후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도 부친은 화가 안 풀리셨나? 결혼식에 참석 안 할 정도로 중국 며느리 받아들이기가 그렇게 창피한 일인가?"
"처음엔 그랬지만 많이 변했어. 요즘 손자 재롱에 시간 가는 줄 모르셔. 자네 덕분이야. 자네 사업수완 소식을 듣고 탄복을 하시거든."
"한눈팔지 말고 잘살아."
"알았어. 취업 자리는 알아보고 있는 거지?"
"기다려봐. 헌데 좋은 사장 자리 놔두고 중국엔 왜 가려고?"
"여긴 바닥이 너무 좁고 갑갑해. 경기도 안 좋고. 이참에 과감하게 대륙으로 진출해 보려고."
"그 짧은 중국어 실력에 돌대가리로 적응될까?""무슨 강아지 껌 씹는 소리야, 새벽에 일어나서 중국어 학원 열심히 다니고 있다구."
노크 소리가 나더니 여직원이 다시 들어왔다.
"회장님이 올라오시랍니다."
금산은 선물을 든 종필의 뒤를 따라 한층 위에 있는 회장실로 들어갔다. 창가의 소파엔 장석규와 어디선가 본 듯한 중년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종필은 선물 상자를 회장 테이블에 놓으며 홍민태에게 인사했다.
"홍 실장님 안녕하세요?"
"오 그래 오랜만이군,"
금산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장석규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장 회장님."
예전의 태도와는 달리 장석규는 환히 웃으며 금산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사돈님 어서 오세요. 그리 앉으세요."
금산은 깍듯해진 장석규의 태도를 보며 열패자의 비열함 같은 것이 느껴졌다.
"여! 왕 사장. 이거 몰라보겠는 걸, 하긴 어렸을 때 보았으니까. 날 알아보겠나?"
금산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자 종필이 거들었다.
"왜 몰라? 홍민태 실장님."
그제야 금산은 대룡반점에서 일할 때 뺀질이처럼 얄밉게 굴던 얼굴이 생각났다.
"아. 예. 이제 생각이 납니다. 홍 실장님. 대룡반점 일이 있을 때마다 많은 도움 주셨다고 아버님께 애기 들었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면서 금산은 옆에 앉은 홍 실장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야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인데. 헌데 젊은 나이에 그렇게 사업 번창을 시켰다니 대단해."
홍민태는 금산의 손을 마주 잡고 몇 번 흔들었다.
그러자 장석규가 헛기침을 하더니 고개를 숙이며 사과부터 했다.
"죄송합니다. 다 제가 부족한 탓입니다. 북경에서 결혼식을 성대히 올렸다는 말은 들었습니다만 바쁘다는 핑계로 가보지도 못했습니다."
금산은 자신의 결혼식에 항공권을 보내 사돈이 된 장석규를 초청하고 싶었으나 종필이 말렸다. 자신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은 장석규가 혹시 거절이라도 한다면 서로의 입장만 난처해질 것 같아 금산도 종필의 의견을 따랐다.
"집사람이 한족 여자고 해서 친지 가족들만 모시고 했어요. 종필이가 대표로 참석했으니 된 거죠. 참 인사가 늦었습니다. 우리 부족한 리화 거두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휴. 우리 집에 복덩이가 들어온 거지요. 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홍민태의 눈치를 살피는 그의 표정이 굳어지는 것을 보았다. 아직도 중국인에 대한 편견이 가시지 않았다는 걸 금산은 직감했다.
리화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장석규는 노발대발 난리 쳤다.
'종자 버렸다.' '집안 망신이다.' '중국 며느리 해서 선거 끝났다.'
주변에 떠들고 다니는 별별 소리가 금산의 귀에까지 들렸다.
분위기가 어색해짐을 감지한 장석규가 재빨리 화제를 바꿨다.
"제주가 무비자 지역이 되면서 사업이 날로 번창한다면서요?"
"이 건만 성사되면 우린 중국 자본을 끌어들여 국제도시를 만들 수 있어서 좋고, 랴오닝도 콘도나 빌라를 자국민들에게 분양해서 많은 차익을 남길 수 있어서 좋을 것 아냐?"
그 말에 종필이 끼어들었다.
"하루에 전세 비행기 다섯 대씩 띄워요."
"요즘 제주에 오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전세기 잡고 스케줄 짜고 중국 왔다 갔다 하느라 조금 바쁩니다."
"다섯 대라면 천 명이 넘을 텐데, 그 많은 관광객을 어떻게 소화하지?"
종필이 대룡관광의 대변인인 것처럼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아버지. 대룡관광은 관광객들 직접 상대하지 않아요. 하청 여행사가 열이 넘는대요."
"그래? 그들 먹여 살리려면 열심히 뛰어야 하겠네? 듣자니 호텔, 식당도 매입하고 전세버스 회사까지 가지고 있다면서?"
"그거 이제 시작입니다."
금산은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우쭐대며 거드름을 피웠다.
가만히 상황을 바라보던 홍민태가 분위기를 깼다.
"서로 바쁜데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제가 개략적인 것을 말씀드리죠. 지금 도에서는 박 지사가 들어서면서 의욕적으로 개발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있어요. 그중 하나가 중국인들을 유치해서 한 마을 전체를 차이나타운으로 조성하려는 계획이 진행 중이에요."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장석규가 끼어들었다.
"타당성 조사도 이미 끝냈고 발표만 남겨둔 시점이지요."
"그래서 왕 사장이 화교이고 해서 중국 기업과 다리를 좀 놓아달라는 거요."
금산은 부동산 사업은 처음이지만 구미가 당겼다.
"제가 무슨 일을 하면 되지요?"
금산이 조급해하는 것을 눈치 챈 홍민태가 낚시대를 쳐 올리듯 말을 이었다.
"왕 사장이 중국 랴오닝 그룹과 연줄이 있다면서?"
"예. 작은할아버지가 리쩌라이 회장님과 처남, 매부 지간이고 그룹 고문으로 계십니다. 대룡이 이만큼 성장할 수 있던 것도 할아버지 조력 덕이지요."
홍민태는 만족한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일이 수월하게 잘 풀릴 수 있겠군. 좋아요. 삼미동 차이나타운 프로젝트에 대해서 우리가 직접 랴오닝에 피티(프리젠테이션) 할 수 있게 주선해 줘요."
"우리라면?"
그러자 다급하게 장석규가 나섰다.
"나와 홍 실장님, 그리고 전형진 지사 셋이요. 리 회장과 면담 일정 잡고 왕 사장이 통역으로 동행해줬으면 해요."
굳이 장석규가 따라나서는 것은 차이나타운 건설 공사를 따내려는 속셈이라는 게 뻔히 보였다.
"그렇다면 리 회장님보다는 아들 리밍타오 부회장님을 만나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리 회장님은 연로하셔서 은퇴를 앞두고 있고 모든 실권은 부회장님이 갖고 있으니까요."
장석규가 쾌재를 부르며 즉시 응답했다.
"이래서 정보가 필요하다니까."
홍민태는 입술이 마르는 듯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에 침을 발랐다.
"이 건만 성사되면 우린 중국 자본을 끌어들여 국제도시를 만들 수 있어서 좋고, 랴오닝도 콘도나 빌라를 자국민들에게 분양해서 많은 차익을 남길 수 있어서 좋을 것 아냐?"
"부회장님께서도 해외개발에 관심이 많으시니까 좋아 하실 거예요. 그러잖아도 제주도 투자계획에 대한 마스터플랜을 마련 중이라고 들었어요."
장석규가 재빠르게 맞장구를 쳤다.
"그거 잘 됐군."
"성사만 되면 회장님께서도 재기하실 좋은 기회가 되시겠네요. 우리 매제도 랴오닝에서 일할 계기도 될거구. 꼭 성사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홍민태는 감격한 듯 금산의 손을 양손으로 감쌌다.
"왕 사장만 믿네."
종필도 주먹을 불끈 쥐며 화답했다.
"왕금산 파이팅."
장석규는 크게 감읍을 한 듯 얼굴마저 상기되었다.
금산은 과거 장해연 때문에 당했던 수모를 떠올리고는 피식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강준 작가 joon44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