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Ⅱ] (7·끝)이방익 신(新)기행의 의의

[제주사람 이방익 표류현장을 가다Ⅱ] (7·끝)이방익 신(新)기행의 의의
발로 디딘 이방익, 문헌 탐색 연암… 실제 그곳이 있었다
  • 입력 : 2019. 09.24(화)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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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자릉 조대의 두 기록 생생
일부는 확인 필요한 내용도
동정호 갔을지는 판단 유보
선하령·강랑산 등 이색 기행
이방익 연구 영역 확대 기대
한·중 문화교류사 의의 깊어

'제주사람 이방익의 표류현장을 가다' 두 번째 탐방은 지난 4월 12~21일 이루어졌다. 이번 탐방에는 자문위원인 '평설 이방익 표류기'의 저자 권무일 작가와 심규호 제주국제대 석좌교수, 강만생 한라일보 고문 등 6명이 함께했다.

탐방단은 제주를 출발해 상하이에 도착한 뒤 강산시로 이동해 표류민 이방익 일행이 북경으로 송환되었던 노정을 차례대로 밟아갔다. 복건성에 이어 이번에는 절강성, 강소성 일대를 돌아봤는데 마침 1797년 이방익이 그곳을 거쳐갔을 계절과 비슷한 시기였다.

이 기간 주제주중국총영사관의 도움을 받아 입팔도고진, 선하령, 강랑산, 엄자릉 조대, 항주 서호, 소주 한산사, 호구사 등을 찾았다. 이 과정에서 절강성, 강소성의 지방지연구자들과 간담도 가졌다.

두 번째 탐방을 마무리지으며 심규호 교수의 글을 싣는다. 지난해와 올해에 걸쳐 두 차례 진행된 '이방익 신(新)기행의 의의'를 담은 글로 이방익 관련 기록의 확인과 검증, 한·중 양국 연구 성과 공유 필요성 등을 짚고 있다. 진선희기자

제주 탐방단이 절강성 지방지연구자들과 간담회가 끝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강소성 지방지연구자들과 간담회가 끝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방익은 '표해록'에서 엄주부 진덕현 엄자릉이 머물던 곳을 적어놓았다. 실제로 가보니 칠리탄 위쪽에 조대(釣臺)가 있었으며 엄자릉과 관련이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서이방익사'에는 조대를 다루면서 십구천(十九泉)을 소개했는데 실제로 가보니 과연 십구천이 있었다. 이를 통해 이방익이 실제로 이곳을 거쳤으며, 박지원은 실제 가보지 않았음에도 문헌을 통해 이를 확인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예도 있다. 동정호와 악양루에 관한 부분이다. '표해록'에 따르면 이방익 일행은 위관의 권유에 따라 4월 보름에 악주로 갔으며 동정호와 악양루를 구경한 것으로 나온다.

이에 대해 박지원은 의문을 품었으며, 호북성의 동정호와 악양루를 간 것이 아니라 태호를 구경한 것에 불과하다고 했다. 절강성이나 강소성에서 만난 학자들은 이방익의 동정호 구경에 대해 다음 두 가지 이유를 들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첫째, 항주에서 동정호는 며칠 만에 갔다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시간적으로 불가능했을 것이다. 둘째, 이방익은 호송되어 귀국길에 오른 사람이며, 중앙의 관리가 호송 책임을 맡고 있었다. 자유롭게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처럼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강랑산. 사진=진선희기자

필자는 판단을 유보하는 입장이다. 왜냐하면 이방익이 굳이 거짓으로 동정호에 갔다왔다고 할 이유가 없다는 점이고, 그가 언급한 악주나 구강이 모두 동정호로 가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호송 책임을 맡은 이의 권유에 따랐다는 점 때문이다. 이는 향후 악주, 구강, 동정호 탐방을 한 후에 나름의 결론을 내리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기록에 의문이 나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표해록'에 따르면 "호구사와 지주사를 거쳐 소주부 서문 밖에 배를 매니 이 땅은 손권(孫權)의 도읍터였다"고 했고 "동문 5리 밖에 강이 있는데 이는 적벽강이다"라고도 했다. 그러나 호구사가 있는 지역은 손권의 도읍지가 된 적이 없다. 손권은 남경과 호북 악주에 도읍했기 때문이다. 근처의 적벽강 운운도 틀린 것 같다. 혹시 동정호를 여행하면서 돌아오는 길에 본 것과 착각한 것이 아닌가 싶다. 또한 박지원은 '서이방익사'에서 화정(본명 임포)이 글 읽던 곳이 호구산에 있다고 했는데 어떤 문헌에서 인용한 것인지 모르나 확인하기 어렵다.

중국식 건축물인 패방이 세워진 엄자릉 조대. 이방익은 실제 그곳을 경험한 뒤 생생한 글을 남겼고 박지원은 문헌을 참고해 실제 가본 것처럼 기록했다.

이번 기행에서 이방익이 거쳤던 경로는 물론이고 그외에 여러 곳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방익의 경로 중에는 선하령처럼 이전에 복건에서 절강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했던 옛 길이 그대로 남아있다. 선하령은 중국인들이라면 모를까 한국인에겐 낯선 길목일 따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기행을 통해 새롭게 만남으로써 향후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강랑산의 경우도 한국인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곳이나 세계자연유산의 한 곳으로 풍광이 수려하고 기이한 절벽이 아름다웠다. 이 또한 이번 기행에서 새롭게 살피게 된 풍광이라 할 수 있다.

표해록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논구한 바 있으나 이방익의 경우는 아직 연구 영역이 많이 남아 있다. 이 기행을 통해 양국의 전문가들이 서로 연구성과를 공유하면서 이방익은 물론이고 여러 표류객들의 연구에 일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특히 표해록과 표해인의 연구는 크게 보아 고대 한·중 문화교류사의 한 대목이다. 이를 중시해 한·중 문화교류의 일환으로 나름의 의의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방익 표류 현장을 통해 새롭게 발견한 선하령. 복건성에서 절강성으로 향할 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이었다.

무엇보다 표해록은 한 개인이 이국에 표류하면서 겪은 체험담이자 이국 풍물에 대한 감상, 그리고 벼랑 끝에서 벗어난 한 인간의 인생에 대한 기록이다. 표해록을 기록한 자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생존, 귀국의 열망, 이러한 것들이 불굴의 의지를 만든 것이 아닐까? 이른바 발분저서의 실례이자, 삶에 대한 치열한 갈망이 기록에 대한 의지로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이방익의 '표해록'은 바로 그런 예증이다. <심규호 제주국제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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