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한라에서 백두까지] (8)압록강과 단둥을 가다(하)

[2019한라에서 백두까지] (8)압록강과 단둥을 가다(하)
고구려 박작성이 만리장성 동쪽 끝 기점으로 둔갑
  • 입력 : 2019. 11.06(수) 00:00
  • 이윤형 기자 yhlee@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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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리포트



단둥에서 신의주시를 바라본다. 두 도시는 압록강이 서해로 흘러가는 하구에 위치하여 서로 마주보고 있다. 북한 신의주시에서 중국 단둥을 먼저 바라보지 못했는데, 거꾸로 중국 땅에서 북한 신의주시를 바라보게 되는 현실이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과거에는 우리나라와 중국 간 양국의 사신 및 상인들이 수없이 드나들었던 곳이 아닌가.

중국이 호산장성으로 부르는 이 성곽은 과거 고구려 성터 위에 새로 보수한 것으로 원래는 박작성이었다. 강희만기자

물론 엄밀하게 말하면 이곳 단둥에서 동북쪽으로 15~20km 떨어진 중국의 구련성(九連城)이나 봉황성(鳳凰城)이 과거 조선의 사신과 상인들이 중국 국경을 통과했던 곳이다. 그 당시 조선에서의 월경은 의주목(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이곳으로 피난한 이후 의주부로 승격됨) 관할이었다.

바로 압록강 건너편 신의주시는 조선시대 때는 의주목의 변두리였다.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일으켰고, 서울에서 압록강 입구까지 군용철도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1905년 4월 경의선 철도가 완공되었다. 이 철도의 종착지로 새로운 의주라는 이름의 신의주가 탄생되었다.

일본은 신의주를 대륙침략의 거점으로 삼으려 1911년 압록강철교를 세웠다. 이후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교통은 신의주를 통해 이루어졌다. 단둥 역시 옛 이름은 안동(安東)으로 1907년 개항장이 되었고, 1910년 이후 일본의 대륙진출 문호로 발전하다가 1965년 단둥으로 개명하였다.

압록강변의 중조변경 표시. 강희만기자

의주에서 봉황성 및 구련성을 오갔던 예전이나, 신의주에서 단둥으로 통하는 오늘날이나 압록강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 압록강은 그 물빛이 오리 머리처럼 푸르다고 해서 지은 이름이다. 중국 명나라 장천복이 지은 '황여고(皇輿考)'에는 "천하에 큰 물 셋이 있으니, 황하와 장강(양자강), 그리고 압록강이다"라고 되어 있다. 연암 박지원도 1780년 연행 중 의주에서 장마 때문에 열흘이나 머물다가 압록강을 겨우 건너 구련성으로 들어갔다.

단둥에서 둘러본 우리의 역사유적으로는 위화도, 박작성(泊灼城, 중국명 호산장성), 일보과 등이 있다. 먼저 압록강단교 부근의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탔다. 건너편 신의주시와 위화도를 휘 둘러보고 돌아오는 코스였다. 위화도의 서남쪽 강변에서는 북한 아이들이 헤엄을 치거나 아낙네가 빨래하는 모습이 보였다. 괜히 울컥하여 손을 흔들어 보았다. 그러자 거기서도 답례를 하는 것이 아닌가. 가슴 속에 진한 여운이 남는 순간이었다.

한 걸음만 더 가면 북한이라는 '일보과'. 강희만기자

위화도는 우리 역사에서 너무도 유명한 곳이다. 1388년 5월 요동정벌에 나선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때문이다. 이는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이 교차되는 그 출발점이다.

박작성은 고구려의 산성이다. '삼국사기'(고구려본기, 648년)에 의하면 당태종이 장군 설만철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자 박작성주 소부손이 항거하였고, 박작성은 산을 의지하여 요새를 이루고 압록강이 가로막아 견고하였으므로 함락하지 못하였다고 전한다.

한치윤의 '해동역사'에 의하면, "박작성은 우리나라 의주 옥강보(玉江堡)의 강 건너편 지역으로, 바로 한나라의 서안평(西安平), 요나라의 갈소관(曷蘇館), 금나라의 파속로(婆速路), 원나라의 파사부(婆娑府)인데, 이는 모두 음이 변한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위화도

그런데 박작성을 중국에서는 호산장성(虎山長城)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1990년대부터 과거 고구려 성터 위에 새로 성벽을 보수하여 축조하고는, 이를 만리장성의 연장선으로 주장하기 시작했다. 급기야 2009년 중국의 국가문물국은 만리장성의 동쪽 끝 기점을 기존의 산해관에서 단둥의 호산으로 변경하였다.

하지만 이 성벽은 명나라 때 후금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산성이고, 명나라 말기 후금 세력 하에 놓일 때는 이미 파기되었다. 따라서 이 산성을 만리장성의 동쪽 기점으로 삼는 것은 논리적으로 무리이며, 역사적 사실과도 부합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홍기표 전 제주특별자치도 문화재위원.

박작성 옆으로 난 작은 길을 따라 압록강까지 걸어가니 '일보과' 표지석이 서 있다. '한 걸음을 건너면 (북한이다.)'이라는 뜻이다. 불과 5m 전후의 개울물을 건너면 바로 북한 땅이다. 그 때문인지 중국과 조선(북한)의 국경이란 뜻의 '중조변경'이란 글자도 함께 새겨져 있다.

일보과 표지석 옆에는 2005년 11월 23일에 건립된 '지척(咫尺)'이라는 표지석도 함께 있었다. 아주 가까운 거리라는 뜻의 지척 표지석 뒤에는 한시 한 편이 새겨져 있다. 1397년(홍무 32) 명 태조 주원장이 지은 '압록강'이라는 제목의 한시다. 흥미롭게도 이 시는 1397년 표전(表箋)문제로 중국에 사신으로 갔던 양촌 권근이 지은 응제시 24수에 대한 주원장의 답시이다.

한편 권근이 명 태조에게 올린 24수의 응제시 중 17번째는 '탐라'에 대한 시여서 흥미를 끈다. 권근은 이 시에서 '푸르고 푸른 한 점 한라산(蒼蒼一點漢拏山) 멀리 큰 물결 아득한 사이에 있네(遠在洪濤浩渺間)'-중략- 하고 읊고 있다.

648년 고구려 박작성주 소부손의 저항, 1388년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1397년 권근의 명태조 방문, 1780년 박지원의 연행, 그리고 2019년 여름 제주 백두산 탐사단의 단둥 방문은 압록강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졌다. 국가나 사람은 명멸하는데, 압록강은 그때나 지금이나 유유히 흐른다. 중국과 남북의 교류는 이어지는데, 남과 북의 왕래는 언제나 이루어질지 답답할 뿐이다. 다만 압록강에서 배를 타고 위화도 사람들과 멀리서나마 서로 손 흔들며 교감을 이룬 감흥이 아직까지 남아 있어 위안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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