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13)조왕할망

[김유정의 제주문화사전] (13)조왕할망
제주여성 힘 보여주는 여권 상징… 남자는 '들은 뿐 본 뿐'
  • 입력 : 2020. 06.08(월) 00:00
  • 편집부기자 hl@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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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신, 옥황대제 명 받든 사자(使者)
한국선 여성신으로 불·음식 관장
집안 남자들도 조왕제엔 관여 안해




#도교의 조신사상(조神思想)

중국의 불의 신은 염제(炎帝)다. 염제는 중국 남방 지역을 다스렸으며, 신농(神農)씨라고도 하는데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날 그 지방 아홉 군데에서 샘물이 솟아났다고 하며, 처음으로 사람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염제가 죽자 조신(조神)이 되었고, 그의 제사가 행해졌다. 화덕(火德)으로 천하를 통치했던 이 조신을 조군(조君), 또는 한국에서는 조왕(조王)이라고 하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동아시아의 중요한 민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도교에서는 조신을 곤륜노모(崑崙老母)로 여기며, 조왕경(조王經)에서는 '종화노모원군(種火老母元君)'이라고 부른다.

문전제 지낸 제물을 조왕할망에게 드리기 위해 잡식하는 모습. 모슬포, 2018.

또 조신은 성(姓)이 소(蘇)이고 이름은 길리(吉利)라고 하며, 혹은 성이 장(張)이고 이름은 단(單), 자(字)는 자곽(子郭)이라고도 한다. 조신의 직능은 본래 한 가정의 음식을 주관하는 것이었는데 후대에 와서 온 가족의 생사(生死)와 화복(禍福)을 관장하는 역할로 변하였다. 조신은 도교의 최고신인 옥황대제(玉皇大帝)의 명을 받아 지상으로 파견된 사자(使者)로 여겨지며, 각 가정의 부뚜막에 있으면서 그 집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해 두었다가 연말이 되면 하늘로 올라가 옥황대제에게 죄를 보고한다고 믿고 있다. 매년 음력 12월 23일이나 24일에 부뚜막에서 제사를 지낼 때는 집안의 가장이 밤에 조신의 그림 앞에 제물을 바치고 향을 피워 돌아오는 새해의 평안을 기원하였으며, 지역에 따라서 조신의 입에 사탕을 발라 입을 봉하여 나쁜 말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다고도 했다(種肇鵬 主編, 2018).

중국에서 조신은 남성신이었지만 한국에서는 여성신이다. 부엌은 주로 여성들이 불을 관장하고, 음식을 만드는 곳이어서 그 쓰임새 때문에 조신도 여성이 맡았다. 안악 3호분의 벽화를 보면 부엌에서 시루떡을 찌는 여성이 있는데 오른손에 국자를 받치고 왼손으로 긴 꼬지를 이용해서 떡이 잘 익었는가를 찔러보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4세기 중엽에 그려진 벽화에 부엌이 따로 마련돼 있어서 제주도로 말하면 독채로 지어진 '정지거리'에 해당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조신을 조왕할머니, 지역에 따라 조왕각시, 조왕할매, 조왕, 조왕할망이라고도 부르고, 직능은 집안을 정화시켜 주는 불의 신이다. 조왕할망을 그림이나 아무 표지가 없이 관념으로만 모시게 되면 '건궁'이라는 관형어를 붙여 '건궁 조왕'이라 하고, 지역에 따라 그릇에 물을 담아 조왕 물그릇·조왕보세기·조왕중발이라고 부른다(장주근, 1998). 집 여주인은 매일 아침 일어나면 먼저 조왕 물그릇을 새 물로 갈아 넣고 온 가족의 안녕을 기원한다.

조왕을 물이 아닌 다른 신체(神體)로 삼기도 하는데 선반에 삼베 조각을 담은 바가지를 엎어두거나 한쪽 벽에 붙인 백지나 헝겊 조각을 섬긴다(경기도). 방석 모양으로 접은 종이와 함께 북어를 걸어두며, 쌀이 담긴 단지를 솥 뒤에 놓아두기도 한다(강원도). 이 밖에 한지에 '나무조왕 삼왕대신'이라고 써서 선반에 붙여 늘이거나, 그릇 안에 물·쌀·삼베조각을 함께 넣기도 한다, 경상도 어떤 마을에서는 솥 자체를 조왕으로 삼기도 한다(김광언, 2000).

이능화(李能和)는 '조선무속고'에서 "조왕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는 당반(당飯; 노구메; 쇠솥밥)을 사용했으며, 혹은 밤새도록 길게 늘인 등에 불을 켰는데 이것이 인등(因燈), 곧, 신등(神燈)이다. 즉 단군의 아버지 환인천왕(桓因天王)이 신시(神市)의 주재자가 되었기 때문에 조왕신의 제사는 신시로부터 전해온 것이다." 조왕을 민족주의 시선으로 보고 있다.



#제주도 조왕할망

제주도에서는 조신을 조왕할망이라고 하여, 육지와 마찬가지로 부엌에서 불과 음식을 관장하는 여신이다. 부엌을 정지, 정제라고 부른다. 제주도 여성들은 정지가 있으면 솥덕이 있기 마련이어서 자연스레 조왕할망과 같이하게 된다. 자식과 분가해서 안거리에 살던 부모가 밖거리에 바꿔 살아도 아들네와 따로 정지를 쓰며, 달리 모커리(측면에 떨어진 독채)에 마련해 둔 공소간(公所間)이라고 부르는 부엌은 집안 대소사(大小事)에만 쓰는 임시 공용부엌도 있다.

고구려 안악 3호분 부엌의 시루떡 찌는 여인. A.D 4세기.

제주도에서는 부자가 한 마당을 같이 써도 분가(分家)하게 되면 완전히 독립적인 가정이 돼 따로 부엌과 화장실을 쓰고 있다. 부모자식 간에도 일상에서 분명하게 '곱'을 가르는(경계를 짓는) 풍습이 있어서 경제적으로 '이녁만썩'(자기식대로) 살아간다.

제주도의 옛 정지에는 부뚜막이 없었고 솥을 받친 세 개의 자연석이 있어 그것을 솥덕이라고 불렀다. 돌 위에 솥을 앉히면 고대 중국의 세 발 솥인 정(鼎)과 같이 된다. 옛날 대륙에서 제주에 유배 온 사람들의 문화적 향기가 나는 대목이다. 솥덕은 불을 잘 지필 수 있고 불채(불타고 남은 재)를 뒤로 밀어 넣기 좋은 구조이다.

진성기 선생이 채록한 '조왕본'을 보면, 솥을 거는 세 개의 돌을 '덕돌'이라 하는데 곧 삼덕조왕의 신체(神體)라고 한다. 그 돌을 고를 때에도 세 개 모두 깨끗하고 안정적인 모양의 돌이어야 하고 여러 사람 손이 스친 귓돌(올래 모퉁이돌)은 삼가해야 한다.



초하로엔 초덕조왕(初덕조왕)/초이틀엔 이덕조왕(二덕조王)/초사흘엔 삼덕조왕((三덕조王)/할마님/문전(門前) 어머님/예산주부인. (제주시 봉개동 남무 54세 김만택)



삼덕조왕의 솥 밑을 솥강알(사타구니)이라고 하여 불을 지필 때나 불채(재)를 밀어넣을 때 만지(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매우 조심해야 하고 물도 자주 뿌려야 한다. 부엌은 신이 살기 때문에 늘 청결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솥덕 뒤 불채막 공간 내벽(內壁)에는 씨앗을 담은 작은 망태기인 씨부개기를 매달아두면 "씨앗의 기운이 불처럼 일어나서 곡식이 잘 자랄 것이라는 생각도 솥덕이 곧 조왕이라는 신관념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김광언, 2000).

솥덕조왕 세 발로 받친 돌이 곧 조왕할망의 신체다.



조왕할망은 도교적 관념이 무속과 습합되면서 남성신에서 여성신으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문전본풀이'는 제주도 가정사의 비극적 이야기지만 해피엔딩 신화다. 제주도 조왕할망의 이름은 예산부인, 여산부인 혹은 토조부인이며, 서방은 남선비로 문전신(門前神)이 되고, 슬하에 일곱 형제를 두었다. 족은 각씨(첩)는 노일저대구의 똘이 있어 칙간(변소) 신이 되었다.

제주도 조왕제는 정월에서 3월 사이에 집안 식구들의 좋은 날 택일하고, 제사 지내기 2·3일 전부터 금줄을 치고 비리는 것(상가(喪家) 왕래, 출산, 성관계, 돼지고기 금지 등 부정 타는 것)을 범한 사람의 출입을 금한다. 이 조왕제에 집안의 남자들은 '들은 뿐 본 뿐' 일체 말을 하지(관여하지) 않는다. 제물은 메, 명태, 과일, 지전, 시렁목, 소주, 음료수를 준비하여 조왕할망에게 기원한 후에 집안 여러 신들인 문전, 밧칠성, 안칠성에게 집안의 안녕을 빈다.

또한 이 조왕제 말고 집안 조상제사 때에도 조왕할망을 위하는 간단한 제차가 있다. 제주도에는 조상제사 시작 전에 먼저 문전제를 지내는 데 문신(門神)인 남선비를 위한 것이다. 유교제의가 아닌 이 문전제는 육지에 비해 여성의 역할이 크다 보니 남자들이 무속식 제의를 수용한 것이다. 이 문전제를 지낸 젯상을 그대로 부엌의 여성에게 넘기면 부엌의 여주인이 차렸던 제물을 빠짐없이 조금씩 뜯어 그릇에 놓고는 솥덕으로 가져가 놓아둔다. 이것을 '잡식 혹은 걸명'이라고 한다. 문명이 변한 지금은 이 잡식을 싱크대 가스렌지 위에 올려 놓는다. 조왕은 제주도 여성의 역사적 힘을 보여주는 여권의 상징으로, 유교 가부장제와의 문화충돌을 이겨낸 제주도 여성의 무속적 정신문화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부부라도 '이녁만썩' 경제적 경계를 넘지 않고 '곱 가르는 문화'가 바로 조왕 사상의 정신구조임을 알 수 있다. <김유정 미술평론가(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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