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영택의 한라칼럼] 충암 김정 제주 유배 500주년을 맞으며

[문영택의 한라칼럼] 충암 김정 제주 유배 500주년을 맞으며
  • 입력 : 2020. 08.18(화) 00:00
  • 강민성 기자 kms6510@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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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제주오현(五賢) 중 맨 처음 제주와 연을 맺은 충암 선생이 유배온 지 500주년이 되는 해이다. 22세에 대과에 장원급제한 후 순창군수를 지내던 충암 선생은 1515년 임금의 구언(求言)에 응한 죄로 유배를 당하고는 정치에 염증을 느껴 칩거하던 중, 나라의 부름을 받아 마침내 형조판서에 제수됐다. 선생은 정암 조광조와 더불어 미신 타파, 향약 확산, 현랑과 신설, 정국공신의 위훈삭제 등을 추진했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의 공신록에서 가짜 공신을 가려내어 이들에게 준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는 것으로, 공신의 전횡을 막고 왕권의 강화를 위한 개혁작업이었다. 그러나 충암 등은 주초위왕(走肖爲王)으로 알려진 기묘사화(1519년)로 혁명세력의 역공을 받았다. 이로 인해 충암은 금산유배 후 진도를 거쳐 제주도에 1520년 8월 유배됐다.

내팟골 동쪽 언덕 허물어진 금강사에 안치된 김정은 제주 유생들과 교류하며 제자를 키우기도, 우도가와 제주목사 이운의 부탁으로 한라산 기우제문 등을 짓기도 했다. 주민들이 봉천수(奉天水)를 마시는 것을 보고는, 가락천에 우물을 파서 깨끗한 물을 마시게도 했다. 섬사람들은 판서를 지낸 김정이 장만한 우물을 판서정이라 부르며 그의 공덕을 기렸다. 1940년대 후반에 허물어진 판서정을 대신하듯, 동문시장 남쪽 산지천 다리 곁에 세워진 안내 표석이 그나마 충암 선생의 자취를 전해주고 있다.

특히 충암은 16세기 제주섬의 풍토와 문화를 그려낸 기록문화 유산인 '제주풍토록'을 남기셨으니,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런데도 제주도는 여전히 조용하다. 이에 뜻을 같이 하는 4단체가 제주의 역사문화를 공유하고자 2019년 비영리 민간단체인 '귤림서원'을 조직해 제주도에 등록했던 것이다.

충암 선생이 금산에 유배 시 보은에 있는 노모를 만나러 간 것을, 간신들의 모함에 의해 도망으로 추죄한 조정은 사약을 내렸고, 선생은 그의 나이 36세에 절명시를 남기고 1521년 10월 제주에서 죽음을 맞아야 했다. 이후 제주의 선비들은 제주목사 이운에 의해 후세에 전해진 절명시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읊으며 충암을 기리곤 했다. 그 후 1578년 조인후 판관이 가락천 동쪽에 충암묘(廟)를 짓고, 1659년 명도암 김진용의 건의로 이괴 목사가 장수당을 건립하고, 1665년 최진남 판관이 가락천에 있던 충암묘를 장수당 근처로 옮기니 드디어 사(祠)와 재(齋)를 갖춘 귤림서원이 세워지고, 1682년 제주섬에도 사액서원이 처음으로 들어서게 됐다.

사후에 충암은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이란 시호도 받았다. 특히 사림(士林)들에 의한 200여년 동안의 끈질긴 상소 끝에, 정조 임금으로부터 충암 종가(宗家)는 불천위(不遷位)의 윤허를 받았다. 불천위란 백성의 본보기가 되는 위인에게 임금이 내리는 은전으로, 4대 이후의 조상 신위도 사당에 모시고 제사를 받드는 일을 말한다. 충암은 보은의 상현서원, 청주의 시항서원, 금산의 성곡서원, 제주의 귤림서원 등에 제향됐다. 대전시 동구 신하동(273-2)에 위치한 충암 종가 일원은 대전시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충암 입도 500주년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일은 곧 미래를 준비하는 일이리라! <문영택 귤림서원 이사·(사)질토래비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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