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마을 가치 찾기] (2)제주가 시작되는 곳, 상추자도

[제주마을 가치 찾기] (2)제주가 시작되는 곳, 상추자도
제주와 내륙 징검다리… 이젠 쉼이 가능한 관광지
  • 입력 : 2020. 11.04(수)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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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실상부한 추자도 행정·경제 중심
영흥리는 어민항일운동 2차 발생지
나바론 하늘길에선 상추자가 한눈에
풍성한 밥상에 커피 한잔의 휴식도

오전 9시 30분. 제주항 여객터미널에서 추자도행 쾌속선이 떠나는 시간이다. 1시간여를 배를 타고 가야 닿는 곳이기에 약간 긴장이 된다. 바다의 출렁거림에 따라 편안한 여행이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다행히 파도가 잔잔해 배 멀미는 없었다. 기분 좋은 여행의 시작이었다. 상추자항에 도착하니 바다내음이 훅하고 들이친다. 섬에 당도했음을 알리는 알람과 같다. 가을이 깊어지는 시점이었지만 날씨는 생각보다 따뜻했다. 섬을 둘러치듯 감싸 안은 산들 덕분인지 바닷바람이 부드럽게 안겼다.

하늘 위를 걷는 기분이 들게하는 나바론 하늘길

제주에서 북쪽으로 45㎞ 지점에 위치한 추자도는 제주행정구역의 시작을 알리는 섬이다. 과거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한반도와 제주를 잇는 중요한 요충지였다. 특히 뱃길에서 풍랑을 만나면 이곳에 의지했다. 그래서 바람을 피해가기 위해 기다리는 섬이라는 뜻의 '후풍도'라고 불리기도 했다.

1374년 목호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탐라로 출정하던 최영장군 역시 풍랑을 만나 이 곳 추자도 대서리에 머물렀다. 그때 어부들에게 그물로 고기 잡는 법을 알려주는 등 여러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고마움을 잊지 않지 않기 위해 사당을 짓고 어업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최영장군을 모시게 됐다. 추자 초등학교 북서쪽 언덕 위에 가면 사당을 볼 수 있다. 최초의 사당은 고려후기에 지어졌으나 지금의 건물은 1974년에 복원한 것이다.

추자도에 처음 사람들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1200년경으로 추정한다. 이후 이곳은 전라도와 제주도로 번갈아 소속이 바뀌다가 결국 1915년 제주도 추자면이 됐다. 한때는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목포나 광주 등으로 유학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으나 지금은 제주도가 주생활권이 됐다.

최영장군 사당

상추자도에는 대서리와 영흥리 마을이 있다. 서쪽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는 뜻의 대서리에는 상추자항을 중심으로 초등학교와 면사무소 그리고 수협 등 관공서 등이 밀집해 있다. 최근에는 추자 체육관과 복지회관이 건립돼 주민들의 복합공간이 많아졌다. 또한 식당과 편의점 등의 상권도 대서리에 주로 자리한다. 명실상부 추자도 행정과 경제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다.

영흥리의 옛 이름은 '절기미'이다. 마을 뒷산에 절이 있어 유래된 이름이다. 하추자를 오가기 위해서는 영흥리를 거쳐야 한다. 과거 다리가 없던 시절에는 이 곳 '진두가'가 나루터 역할을 해 오고갔다. 지금은 영흥리 남쪽의 연도교를 따라 상·하 추자를 편하게 넘나들 수 있게 됐다. 영흥리는 일제강점기의 어민항일운동의 2차 발생지이기도 하다. 1932년 일본어민들이 유자망 어업으로 고기를 남획하는 것에 반발해 생존권 쟁취를 위한 항일운동을 했다.

무지개를 닮은 추자초등학교

최근 추자도민들이 가장 추천하는 곳은 '나바론 하늘길'이다. 속칭 용둠벙에서 독산, 큰산 그리고 등대전망대로 이어지는 능선의 바닷가 쪽 경사면을 나바론 절벽이라 부른다. '나바론 하늘길'은 이 절벽의 능선을 따라 조성된 길로 마치 하늘을 걷는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른 아침 해맞이와 함께 하늘 길을 걸었다. 계단을 올라 능선을 따라가니 아찔한 절벽들과 마주한다. 작은 섬들을 품어 안은 바다에 방금 얼굴을 내민 햇살이 들이친다. 황금빛 출렁임이 가만가만 절벽 밑둥에 와 부딪친다. 절벽을 잇는 철 계단의 "도당도당" 소리가 긴장을 더 부풀리게 한다. 마지막 난코스다. 여기서 포기하면 안 된다. 멋진 경치는 이후에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코끼리 바위를 지나 휴게 벤치에 앉으면 그제야 잔뜩 움츠린 근육들이 풀린다. 어디가 꼭대기인지 알 수 없어도 좋다. 오르락내리락 능선을 따라 끝까지 가면 등대에 닿는다. 상추자가 한눈에 내다보이는 풍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그저 이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추자도에 오길 잘 했다는 생각이 들만큼 뿌듯해진다.

대서리 벽화골목

그러나 추자도에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풍성한 밥상이다. 어느 식당에 가든 3~4종의 김치는 기본이고 맛깔스런 젓갈에 그리고 싱싱한 해산물이 한가득 나온다. 맛의 비결이 무엇이냐고 하면 으레 집집마다 담그는 멸치액젓이 비법이라 한다. 각자 집에서 고유의 손맛으로 정성껏 담가낸 것이니 어찌 맛이 없겠는가? 추자도의 별미 조기와 삼치에 더해 잘 익은 김치만으로도 밥 한공기가 후딱 사라진다. 맛있는 식사 후 커피 한잔의 휴식도 가능하다. 한때 성행하던 단란주점이 퇴색한 대신 다양한 개성의 커피숍들이 생겨난 덕분이다. 시골의 정서와 도시의 편리가 다 갖춰진 느낌이다.

산에서 내려다 본 상추자의 전경

식사 후 가벼운 산책은 대서리 벽화 골목길이 제격이다. 추자도의 절경을 벽화로 풀어내어 소개하고 있다. 423m의 골목길을 따라 걷다 보면 벽화와 좁은 골목에서 만나는 추자도의 정서를 같이 볼 수 있다. 물이 귀하던 시절 군데군데 만들어 사용하던 우물과 낮은 담장의 집들이 공존하며 있다. 대서리 3길 언덕 위에는 추자초등학교가 있다. 1925년 설립돼 현재에 이른다. 남학생 29명, 여학생 19명 총 48명의 학생들이 있다. 학교 건물 외벽의 알록달록한 색상으로 인해 멀리서 보면 무지개를 닮았다.

오후 배가 출항하고 나면 섬은 다시 고요해 진다. 왁자지껄하던 시절의 과거가 빠져나가듯 그렇게 어둠이 내린다. 그러나 인생의 어느 순간만큼은 이런 고요가 필요할 때가 있다. 관광지가 다 시끌벅적할 필요는 없다. 이런 쉼이 가능한 곳이기에 추자가 더욱 매력적이다.

[인터뷰] 원용순 (대서리 노인회장)
"인구감소·어업조건 악화 악순환 개선을

의료문제 해결·대형선박 운항도 과제"

일제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때는 추자도가 일본의 어업전진기지였던 것 같다. 나가사키를 왕복하는 배도 있었고 일본인들도 많이 살았다. 당시 동네 어르신들이 노역에 동원돼 방공호와 굴, 그리고 저수지 등을 파는 것을 보았다. 당시 일본군들은 봉골레산 앞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 미국 전투기가 오면 우리도 다 같이 피하러 다니곤 했다.

대서리는 항구를 하기에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췄다. 바람을 막아주는 섬들과 거친 물살이 들이치지 않게 둥글게 휘어진 지형, 그리고 바닥에 깊은 뻘이 있어 배가 정박하기에 좋다. 그래서 이 곳에 항구를 만든 것이다. 과거에는 멸치, 미역, 생선 말린 것 등을 해남이나 강진으로 가서 팔고 쌀과 보리로 바꿔왔다. 경제권역이 전라도와 연결됐다. 하지만 지금은 제주로 나다닌다.

어업이 성행하던 70년대 중반까지도 추자도에는 사람이 많았다. 하지만 인구가 점점 줄고 있다. 그러다보니 어업조건이 나빠지며 다시 노동인구가 감소한다. 악순환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우선, 의료문제가 해결돼야 한다. 보건소와 한의원이 하나씩 있는데 응급상황이 생길 때 조치를 할 수가 없다. 골든타임을 놓치기 십상이다. 그리고 항구를 보강해 대형선박이 들고 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취항한 여객선은 규모가 작아 날씨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 주민들이나 관광객들이 발이 묶이는 경우가 많아 예측할 수가 없다. 이를 해결해야 보다 쉽고 편하게 추자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담수화 사업으로 물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곳곳에 물통을 마련해 물을 보관하는 게 큰일이던 시절이 있었는데 한시름 놓게 됐다. 그리고 전기의 경우 낙도 전압촉진법에 의해 흑산도와 추자도가 가장 먼저 놓여진 사례가 있다. 이런 적극적 정책도입으로 추자도가 보다 발전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주길 바란다.

<글·사진 = 조미영(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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