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정의 하루를 시작하며] 먹을 수 있되 먹을 수 없는

[김문정의 하루를 시작하며] 먹을 수 있되 먹을 수 없는
  • 입력 : 2020. 11.11(수) 00:00
  • 강민성 기자 kms6510@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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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삽으로도 좋았다. 물이 빠져나가 반반히 다져진 넓은 모래톱. 한 지점을 골라 삽날을 세우거나 눕혀 꽂는다. 어깨 넓이만큼의 폭으로 찬찬히 바닥을 긁는다. 서걱거리다 달깍, 걸리면 거의 조개다. 쪼그린 다리가 저리면 아예 들어앉는다. 엉덩이로 조금씩 이동할 뿐 좀체 일어날 기미가 없다. 모래범벅에다 자잘하지만 무늬도 다양해 캐는 재미가 쏠쏠하다. 조금 더 바다로 나아가면 발목에 찰랑거리는 느낌이 좋다. 물의 온도는 시원하고도 따뜻하다. 선 채로 발을 비벼대면 바닥이 파이면서 밟힌다. 휘돌던 모래알갱이가 잦아들면 작은 물고기와 새우들도 살랑거린다. 바위와 자갈 틈에서 고둥, 보말을 줍고 참게를 잡거나 거북손을 딴다. 양이 많건 적건 시장에서 살 수 없는 즐거움이다. 하지만 이제는 꿈일 듯하다. 슬프다.

10년 전, 안전을 장담하던 도쿄원전에서 사고가 났다. 최근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 해양방출방침을 정식 결정하려다 보류했다. 탱크용량이 거의 다 찼고 더는 미룰 수 없단다. 유보일 뿐 포기는 아니다. 국내의 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처리수'라 바꿔 부르고, 희석해서 무해하다 강조하는 뻔뻔함. 가장 싸고 손쉬운 방법을 고르고 가장 힘없는 곳을 택하는 졸렬함. 흐르고 흘러 어디든 가고 섞일 텐데 대놓고 버리겠다는 무책임함. 그런데도 먼 얘기로 방사선 수치는 막연하고 피폭에는 무감하다. 꼼꼼히 따져 묻지 않고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다. 이제 제주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인 나라 전체가 오염수에 갇힐 것이다. 먹을 수 있되 먹을 수 없는, 미래의 바다는 단지 육지를 잇는 뱃길이거나 멀리 두고 보는 풍경이 될 지도 모른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미래의 연대기'는 체르노빌 사고 당시, 단지 원전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가적 재난을 당한 벨라루스의 이야기다. 100여명을 10년 넘게 인터뷰하며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죽음, 사랑을 담았다. 그들은 살아 있는 블랙박스다. 원전이 없었어도 통째로 묘지가 되어버린 마을. 국경은 의미가 없다. 인접했던 벨라루스 국민의 주요 사망 원인은 피폭. 체르노빌 이후의 출생자들은 암·신경정신질환·지적장애·유전자 돌연변이 등을 앓고 있다. 계속되는 저준위 방사선의 영향이 의심되는 '체르노빌 장애'다. 위험천만한 사고 수습 현장의 그들은 1급 장애인이 됐고, 두려움에 대한 보상은 알량한 돈 몇 푼과 죽음이다. 별안간 쓰러지고, 잠들고는 깨어나지 않고, 문득 심장이 멎는다. 갑자기 죽고 계속 죽는다. 누구의 잘못일까. 30년 넘게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체르노빌 이후, 모든 원전을 폐쇄한 나라가 있는 반면 일부는 추가로 건설 중이다. 이렇게 위험한데 그렇게 좋은가.

작가의 말처럼 군사적 핵과 평화적 핵은 쌍둥이이다. '반핵(反核)'이 '반전(反戰)'으로 치환될지언정 전등과 무기가 한배에서 나왔다는 걸 대개는 까맣게 잊는 듯하다. 나는 탈 원전에 대한 이견이 이상하다. 핵 없는 다른 길. 히로시마, 나가사키, 체르노빌과 후쿠시마로 표본은 충분하고 두려움은 충만하다. "체르노빌은 우리의 미래다!"가 '체르노빌의 목소리'라면 후쿠시마는 우리의 미래다. <김문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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