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마을 가치 찾기] (4)자연스러움이 풍경 되는 표선리

[제주마을 가치 찾기] (4)자연스러움이 풍경 되는 표선리
바다와 함께 한 삶… 세명주 할망은 설문대신화 오버랩
  • 입력 : 2020. 11.17(화) 00:00
  • 조상윤 기자 sycho@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일주도로·번영로 교차점 위치
약 700년 전 마을 형성 추정
‘백사포’ 4·3 사건 아픔 간직
어선 출어 전 할망당서 정성
메오름서 지귀도·일출봉 조망


표선으로 향하는 97번 도로엔 가을이 가득하다. 화려한 여름의 색들을 다 털어내고 노르스름한 빛깔 하나만 걸친 채 쉬고 있는 자연과 만나는 길이다. 도로 가운데로 가로수 산책길이 보인다. 표선리 초입에 닿았음을 알게 하는 이정표다. 도로가 확장되기 이전에는 저 가로수 터널을 통과해 표선으로 진입하는 느낌이 참 좋았었다. 지금은 자전거 도로와 산책로로 활용되고 있다. 아름다운 가로수 길을 보존하면서도 도로를 확장하기 위해 짜낸 묘책이었다.

바다물질을 위해 가던 해녀의길

표선리는 제주시에서 60㎞지점, 서귀포시에서 30㎞ 지점에 위치하는 해안마을이다. 일주도로와 번영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해 유동인구가 많고 상권이 발달했다. 1914년 일주도로가 처음 뚫린 이후 1917년 마을 네거리에 오일장이 섰다. 이후 석유와 잡화를 파는 가게가 들어서며 상가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지금도 표선리 네거리는 상권의 중심지다.

마을의 역사는 약 7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웃말캐미(서상동)에 처음 사람이 들어와 살기 시작하며 마을이 형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간혹 신석기 시대의 돌도끼와 토기편 등이 표선리 일대에서 발견됐다. 연관관계는 추후 더 조사를 통해 밝혀야 할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1416년 제주도가 3개의 군현으로 개편될 당시 정의현에 속해 있었다. 19세기 후반 표선리와 좌선리라는 두 개의 마을을 합쳐 표선리가 됐다. 이후 동중면 소속의 영남리와 표선리 그리고 좌면 소속의 하천리 일부를 편입해 지금 표선리 지역의 경계를 이룬다. 1935년 면사무소가 이 곳으로 옮겨오며 마을이 더 확장된다. 1940년대가 되자 마을의 규모는 300여 호가 됐다. 표선면의 중심지로 부상하게 된 것이다. 이에 동상, 동하, 서상, 서하, 한지동 등 5개의 구획으로 마을을 나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현재 표선리에는 2909세대의 5528명이 거주한다.(2020년 10월 기준)

표선리 백사장

표선리 마을에 당도하면 제일 먼저 눈을 사로잡는 것은 너른 백사장의 표선해수욕장이다. 하얀 모래가 눈이 부시도록 넓게 드러나 있는 듯 하더니 금새 찰랑거리는 파도가 밀려와 모래사장을 덮는다. 들고나는 밀물과 썰물이 해수욕장을 하얗게 혹은 파랗게 교차하며 물들이는 곳이다. 해수욕장의 규모는 총 25만㎡이다. 이중 백사장이 16만㎡이다. 드넓은 백사장으로 물이 들어도 수심이 깊지 않아 아이들이 놀기에 좋다.

1872년 '정의군지'에는 백사포 (白沙浦)라고 표기돼 있다. 하얀 모래가 두드러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흰모살개' 혹은 '한모살'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이 곳은 제주 4·3 당시 학살의 현장이기도 하다. 흰모래사장이 붉은 바다로 변했던 시절을 살아낸 어르신들의 고통이 매서운 바람처럼 가슴을 치게 한다.

배가 들고 나는 포고의 등대

표선리 사람들은 바다와 함께 살아왔다. 바다와 인접한 지역의 특성에 맞게 포구를 만들고 배를 띄워 나가 고기를 잡았다. 해녀들이 바다로 들고나기 위해서는 바다로 멀리 뻗은 갯바위를 의지해 길을 만들었다. 당포는 조선시대부터 형성된 포구이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여객선이 들고날 수 있는 규모로 확장됐다. 제주와 일본을 오고가는 군대환, 경성환, 복목환 등이 이 포구를 통해 들고났다. 하지만 항구의 수심이 낮아 먼 바다에 배를 세우고 작은 종선을 이용해 포구로 들어왔다. 이 과정에 사고도 빈번했다고 한다.

메오름에서 바라본 표선리 전경

포구 한 켠에 조그마한 기와지붕의 돌집이 이색적이다. 세명주 할망이 좌정하고 계신 당캐 할망당이다. 세명주 할망은 어부와 해녀들을 수호하는 여신이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 그리고 물질을 나가거나 어선이 출어를 할 때는 이 곳에 와서 정성을 드린다. 거대한 여신이고 아들이 7명이었다는 것, 그리고 명주 한필이 모자라 섬을 육지와 잇지 못했다는 이야기들이 설문대할망 신화와 오버랩 된다.

평평한 표선리의 지형을 가로막고 오름이 서 있다. 표선리와 세화리의 경계에 위치한 매오름이다. 오름 꼭대기의 모습이 매가 바다를 향해 얼굴을 내민 형상을 해 붙여진 이름이다. 이 오름에는 내려오는 전설이 있다. 옛날 용궁의 세 아들이 벌을 받고 제주섬에 유배를 왔는데 먹고 살기 힘든 제주사람들이 이들에게 먹을 것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한명 박씨 성을 가진 사람만 음식을 나눴다고 한다. 이에 인심 사나운 이들을 벌주기 위해 제주섬을 물로 잠기게 하고 박씨는 매로 둔갑시켜 산 위로 올려 보냈는데 박씨가 바다의 물고기를 잡아먹으려 하자 이를 돌로 만들어서 지금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자연지형 하나에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재치가 있다.

가을 국화가 만발히 핀 제주민속촌

당캐포구의 세명주할망당

#그림중앙#매오름은 얕은 바다에서 분출해 올라온 수성화산이다. 기다란 능선길을 이루고 꼭대기에 오르면 남원의 지귀도에서 성산일출봉까지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오름 둘레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는데 숲길이 아주 인상적이다. 삼나무와 대나무와 소나무가 번갈아가며 다른 느낌의 길을 만들어 하나의 오름에서 여러 개의 다른 길을 걷는 듯 착각하게 한다. 적당한 오르내림과 나무 각각이 만들어 내는 향취가 매력적이다. 한 시간 여 숲 속을 산책하고 정상에 오르면 멀리 바다가 보인다. 해안선을 따라 시원스레 펼쳐진 표선리 마을과 멀리 성산일출봉까지 아스라하다. 표선리 사람들의 서두르지 않는 넉넉함과 낙천적인 성향은 이런 완만한 지형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과하게 포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툭툭 먼지만 털어내듯 마을을 잘 보존하며 발전시켜 나가길 바란다.

<글·사진 조미영(여행작가)>





[인 터 뷰] “문화공간·병원 확충돼야”
박태숙(표선리 이장)


표선리는 표선면의 중심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심 좋고 환경적으로 잘 보존돼 있다. 최근 이주민들이 많이 들어와 있지만 마을 내 갈등 없이 잘 지내고 있다.

과거에는 보리, 조, 유채 등을 재배했으나 귤농사를 지으며 삶이 많이 윤택해졌다.

최근에는 하우스 농사를 많이 한다. 그리고 바다를 낀 마을이라 어업이 주요 생업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관광객 유입이 많아지면서 서비스 시설도 늘어나는 추세이다.

표선해수욕장을 중심으로 마을 발전을 모색하고 있다. 해수욕장의 주차시설과 편의 시설을 갖추고 야간 조명 시설들을 설치했다. 해안도로를 끼고 드라이브를 하기에도 좋다. 야간에 더욱 멋있다. 제주 올레 4코스가 당케포구에서 시작해 남원으로 이어진다. 그 외에도 제주 민속촌과 해비치 호텔, 허브 동산 등이 표선에 위치한 주요 관광지이다. 최근에는 매오름 산책로도 각광받고 있다. 숲속 길을 걷는 느낌을 주는 곳이다.

아쉬운 점은 응급 의료시설이 없어 애로사항이 있다. 문화공간과 병원이 확충돼야 한다. 또한 해상풍력 사업을 유치했으나 이후 행보가 멈춰 있다. 순조롭게 진행이 될 수 있도록 행정이 신경 써 주길 바란다.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933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