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책방, 한권의책] (8·끝)변시지 : 폭풍의 화가

[동네책방, 한권의책] (8·끝)변시지 : 폭풍의 화가
황토색 화면 위 고독감… 변시지의 세계로 가는 입문서
  • 입력 : 2020. 12.24(목) 00:00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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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작품 '폭풍' 인상적
물러설 곳 없는 처절함 담겨
제주 소재 넘어 본연 일깨워
변시지 연구 이제부터 시작
100주년 차근차근 준비해야


서귀포에서 태어난 화가 변시지. 그의 그림 속에 녹아있는 형언할 수 없는 비애와 고독감, 황토색 화면 위에 검은 선으로 그려진 풍경은 먹 선의 고졸한 멋과 역동성이 함께 어울려 장대한 대자연의 율동으로 형상화된다. 그의 생애와 예술세계로 작품사진과 함께 안내한다. <저자 서종택, 출판사 열화당>

▶대담자

▷고준휘 : 기당미술관 학예사.

▷안재홍 : 서귀포시민의책읽기위원장.



▷안재홍(이하 안)=기당 미술관 학예사로서 서종택 작가의 변시지를 읽어보신 소감은?

▷고준휘(이하 고)=변시지 화백에 대한 조명과 연구는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작가가 변시지 화백과 여러 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면서 채록한 생생한 내용에,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읽는 데 부담이 없게 쓴 것도 매우 좋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변시지라는 예술가의 인생과 작품에 입문하는 데 가장 중요하고 좋은 일차적 자료가 되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안재홍 서귀포시민의책읽기위원장(왼쪽)과 기당미술관 고준휘 학예사가 '폭풍의 화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서귀포시민의책읽기위원회



▷안=서문에서 변시지 화백의 작품에는 '슬픔과 외로움이 평화롭게 어우러져 있다'라고 하는데 그 슬픔과 외로움이란 궁극적으로 어떤 것인가?

▷고=슬픔과 외로움이라는 단어와 평화롭다는 단어가 주는 괴리가 있는데, 각각의 단어가 가지는 부정적이거나 혹은 긍정적인 의미를 배제하고 보면 느낌이 또 달라지는 것 같다. 그의 작품세계를 어떤 측면에서 해석한다면 본질이 아닌 것들을 계속 버리거나 배제해왔다고 할 수 있다. 제주로 내려오면서 지금까지 자신이 습득해온 사실주의적인 화풍을 버렸고, 자연을 그리지만, 자연의 총천연색을 버렸으며, 종국에는 선을 중심으로 하는 극도로 절제되고 생략된 화풍을 완성해갔다. 그렇게 모든 것을 버렸을 때 마지막에 남는 것. 그것이 작가가 생각하기로는 슬픔과 외로움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슬픔과 외로움은 부정적이고 극복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 인간이 자연이라는 거대한 체계 안에서 살아가면서 느끼는 가장 원초적이고 본질적인 감정이며, 따라서 이 둘은 작품 안에서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안=학예사님이 특별히 좋아하는 변 화백 작품이 있는지. 있다면 그 이유는?

▷고=기당미술관에 전시 중인 1983년 작 '폭풍'이다. 그야말로 변시지를 폭풍의 화가라고 부르는 이유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1983년은 변시지 화백이 1975년 제주에 내려온 후 작가로서나 인간으로서나 매우 힘든 과정을 겪고 있던 시기이다. 작가의 마음속에 휘몰아치던 그 폭풍을 그대로 화폭에 옮겨놓은 작품이 아닌가 싶다. 허름한 초가집, 소나무, 조랑말과 지팡이를 든 남자. 불어오는 폭풍에 파도는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며 집과 남자를 집어삼킬 듯 닥쳐오고, 조랑말은 마치 사나이를 보호하듯, 사나이는 지팡이와 조랑말에 의지해 겨우 서 있다. 전체적인 색조도 황갈색이 아니라 붉게 물들어있고, 검은색과 흰색의 대비는 위기감을 더욱 고조시킨다. 특히, 자세히 보면 그림 곳곳에 색을 칠한 후 날카로운 도구로 물감을 긁어낸 표현들이 보이는데, 그럼으로써 정말 이제 더 남아있는 것도, 물러설 곳도 없는 처절함을 전달해준다. 내가 아직 그만큼 나이를 먹지 않아서 그런지, 평화롭고 적막한 작품보다는 이렇게 예술가의 고뇌와 번민이 직접 표현된 작품에 좀 더 매료되는 것 같다.



▷안=변 화백의 작품에는 늘 등장하는 대상이 있는데 어떤 뜻을 품고 있는가?

▷고=태양, 파도, 바람, 초가집, 돛단배, 조랑말, 사나이 같은 소재들이 있는데, 그가 제주에서 황톳빛 화풍을 만들어가면서 등장하게 되는 소재들이다. 작가가 이 소재들을 처음 채택한 것은 역시 '제주'를 상징할 수 있는 요소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작열하는 태양, 척박한 화산섬과 몰아치는 파도, 사시사철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 초가집과 고기를 잡으러 나간 어선, 조랑말, 사나이도 아마 처음에는 작가 본인을 표현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표현하는 선 역시 자세하게 그것들을 '묘사'한다기보다는 먹 선과 같은 필치로 간략화 되고 생략되어 발전했다. 따라서 그것들은 '제주'의 풍토를 표현하는 대상에서 시작했지만, 기호화되면서 보편적인 상징들로서 작용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아마 고향, 더 나아가서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어떤 본연(마음속의 고향)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을 나타내는 소재로 변모했다고 할 수 있다.



▷안 : 늘 등장하는 까마귀에 대해서 좀 다른 의견이 있다. 제주에서 까마귀는 길조라고 하고, 육지에서는 흉조라고 하는데 어느 것이 맞을까?

▷고 : 저도 이 부분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고 있는데, 변시지 화백 본인이 까마귀에 대한 길흉의 의미를 언급한 적은 없는 것 같다. 이 책과 다른 논문들에서의 해석에 의하면 제주에서는 예전부터 까마귀를 길조로 여겼다고 하는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길흉을 알려주는 일종의 전령, 메신저로서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리워하던 이의 귀환에 대한 즐거운 예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바다로 고기를 잡으러 나간 사람의 안전에 대한 불길한 예감 또는 얼마 후 닥쳐올 태풍에 대한 예감 등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그림 속 까마귀는 단순하게 길흉의 의미로서 작용한다기보다 지금 저 까마귀가 전달하려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관객들이 해석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장치가 아닌가 싶다.

▷안=변 화백의 작품에서 황갈색의 색채가 가지는 의미나 가치가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는지?

▷고=저는 개인적으로 변시지 화백의 황갈색 색채를 처음 보았을 때 매우 놀랍고 한편으로는 당황하기도 했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게 느꼈는데, 첫 번째는 제주도의 풍경을 작업의 주제로 삼음에 있어서 그 자연의 색채를 버릴 수 있었다는 것에 놀랐다. 지상낙원이라고까지 불리는 제주도, 특히 서귀포의 자연을 한 번 생각해보자. 지금도 수많은 화가가 그 색채에 매료되어 작업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는 어느 순간, 문득 제주의 색채는 황갈색이라고 판단한 이후 이전까지의 모든 사실주의적 색채를 버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변시지 화백의 풍경화는 이념의 풍경화 또는 철학의 풍경화라고 부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한다. 두 번째는 그렇다면 왜 그것이 황갈색이냐는 점이다. 변시지 화백의 말처럼 그 순간 캔버스가 황갈색으로 보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말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렇게 보였다고 하더라고 작가가 그것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그 색채가 작가에게 주는 충분한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 황갈색은 작가가 생각하기에 가장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색채가 아니었나 싶다. 이글거리는 한낮의 태양의 색이기도 하며, 제주의 근본을 이루는 흙의 색이기도 하다. 또한 제주의 초가집 지붕마다 얹혀있는 이엉의 색채이기도 하다. 따라서 작가는 이 황갈색을 세상의 근본을 이루는 색으로 생각하였고, 이 색채를 어떤 형상을 표현하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의 배경이 되는 색채, 즉 화폭 안에서 세계의 바탕을 이루는 색채로 사용한 것이 아닐까 싶다.

▷안=변 화백을 폭풍의 화가로 표현하는데 어떤가.

▷고=폭풍의 화가라는 표현은 아마 오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변시지, 폭풍의 화가'라는 책에서 비롯된 명칭이 아닐까 한다. 그 이전에 자료에서는 폭풍의 화가라는 단어를 찾기 어렵다. 이 책의 초판이 변시지 화백 생전에 출간된 것을 보면 화백님도 이 별칭을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한 작가의 평생에 걸친 작품세계를 한 가지의 단어로 표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고, 또 그 단어가 과연 그 작가의 모든 작품을 품어내기에 적당한가. 제가 짧은 시간 곰곰이 생각해봐도 그의 작품세계를 모두 표현할만한 단어를 찾기는 매우 어려운 것 같다. 황톳빛의 화가, 빛과 바람의 화가와 같은 단어들도 그를 일부분만 수식하고 있으며, 고독과 외로움의 화가, 고뇌의 화가와 같은 단어들은 또 너무 관념적인 것 같다. 앞으로 변시지라는 예술가에 대한 조명과 평가가 좀 더 충분히 이루어진 후 고민하는 것으로 살짝 미뤄둔다.



▷안=앞으로 기당미술관의 특별한 계획이 있다면.

▷고=2013년 변시지 화백이 타계하였다. 곧 타계 10주년이 되며, 2026년에는 탄생 100주년을 맞게 된다. 아무런 준비과정 없이 타계 10주년이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꾸준하게 그의 작품과 일생을 조명하면서 그 정점에서 앞서 언급한 기념사업들이 치러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기당미술관에서는 내년부터 변시지의 예술세계를 조명하고 연구할 수 있는 전시나 관련 세미나 등을 차근차근 추진해나갈 예정이다. <끝>

<정리=서귀포시민의책읽기위원회>

*서귀포시민의책읽기위원회의 독서대담 영상은 유튜 브 '책 읽는 서귀포'에서 볼 수 있습니다.

노란우산

그림책과 따뜻한 주인장이 있는 동네서점이다. 처음 부부가 안덕면 서광에서 시작한 동네책방은 넘치는 의욕으로 그림책 작가에서 카페, 독서모임, 지구살리기운동까지 보람 있고 의욕 넘치는 발걸음을 이어갔다. 그 열정으로 노란우산 광령점도 개설했다.

방문할 때는 미리 연락하기를 권한다. 서광점 서귀포시 안덕면 녹차분재로 32. 연락처 064)794-7271. 광령점 제주시 하광로 515 104동 102호. 연락처 070-4158-9313. 이용시간 오전 9~오후 7시. 일요일 휴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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