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봄 극장가 최고의 화제작은 단연 '미나리'다. 영화 '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인 정이삭 감독의 자전적인 영화로 한국인의 가슴에 아메리칸드림이 움트던 시절, 낯선 땅에 뿌리내린 한인 가족의 절망과 희망을 풍경을 그리듯 만들어낸 작품이다. 지난해 36회 선댄스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과 관객상을 수상하며 국내 영화 팬들에게도 비상한 관심을 모았던 이 작품은 극 중 '순자'라는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 시상식을 앞두고 진행되는 미국 내 수많은 영화상의 여우 조연상 트로피를 수상하며 더욱 눈길을 끌고 있다. 또한 얼마 전 골든글로브 영화상에서는 미국 영화임에도 불구 외국어영화상 후보에만 지명, 수상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내며 작품 외적으로도 논란과 화제를 모으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어디서든 잘 자라는 미나리처럼, 얼어붙은 작금의 극장가에서도 씩씩하게 자라나고 있는 이 단단한 생명력의 영화는 거세지는 않지만, 확실히 느껴지는 어떤 기분 좋은 바람과 닮았다. 작은 씨앗이 흙과 물과 바람과 손길로 누군가를 먹여 살리는 일을 해내듯이 이 영화 속 쉽지 않은 상황에 놓인 인물들은 스스로 살아내고 타인을 살리고자 끊임없이 움직이고 노력한다. 수많은 시상식에서 주목받고 있는 배우 윤여정의 연기를 비롯해 모든 배우들의 연기가 고르게 훌륭한 작품인 '미나리'는 또한 배우 한예리의 진가에 고개를 크게 끄덕이게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 속 배우 한예리는 모두의 등을 떠미는 바람처럼 부드럽고 강력하다.
'미나리'에서 모니카 역할을 맡은 배우 한예리는 2005년 단편 영화 '사과'로 데뷔한 이후 '백년해로외전', '달세계 여행' 등 독립 단편영화와 '환상 속의 그대', '바다 쪽으로 한 뼘 더', '푸른 강은 흘러라' 등 독립 장편영화를 통해 독립 영화의 보석으로 자리매김했던 배우다. 이후 '코리아', '스파이', '해무' 등 상업 장편 영화와 '최악의 하루', '춘몽' 등 독립 장편영화, '청춘시대', '육룡이 나르샤' 등 TV 드라마를 넘나들며 다양한 장르와 캐릭터를 연기해온 배우 한예리는 영화 '미나리'를 통해 누구보다 예리하고 믿음직한 배우임을 입증한다. 17년 차의 베테랑 배우 한예리가 연기한 '미나리'의 모니카는 극 중에서 전사가 보이지 않는 인물이다. 이 말은 극 중 인물의 무수히 많은 삶의 굴곡들을 배우 스스로가 더 많이 짊어져야 할 어려운 캐릭터를 맡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가 시작하면 모니카는 이야기의 처음에 도착해 있고 영화가 끝날 때 모니카는 이야기의 마지막을 붙들고 있다. 낯선 땅, 다른 곳을 바라보는 것 같은 남편, 몸이 아픈 아들과 자신을 닮은 딸 그리고 고향에서 당도한 그리운 엄마까지 모니카를 둘러싼 세계는 모니카의 손길 없이는 작동하기 어렵다. 말하자면 모두가 모니카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영화의 초반부 앞으로 살아가야 할 트레일러 하우스 앞에 도착한 모니카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 높이 앞에 한숨을 쉰다. 바퀴 달린 집에서 뿌리를 내리는 일은 가능할까. 모니카의 마음은 복잡할 수밖에 없다. 먼저 트레일러 하우스에 오른 남편 제이콥이 손을 내민다. 하지만 모니카는 제이콥의 손을 잡지 않고 마치 담을 넘듯 스스로의 힘으로 그 높이를 오른다. 배우 한예리는 연기가 아닌 무용을 전공한 현직 무용수이기도 하다. 모니카가 트레일러 하우스를 단숨에 오르던 그 장면은 여러 의미에서 탄성이 나온다. 안쓰럽지만 믿음직한 모니카의 움직임에 배우 한예리의 선택과 책임의 무게가 겹쳐 보여 그랬던 것 같다. 어린 시절부터 춤을 추어 왔던 그녀의 몸은 마치 전문 산악인의 그것처럼 날렵하고 단단하고 믿음직했다. 그러고 보니 한예리는 몸으로 하는 연기에 누구보다 능한 배우이기도 하다. '코리아'의 탁구 선수와 '스파이', '육룡의 나르샤'의 액션 연기는 두고두고 회자될 정도였다. 아마도 많은 대중이 드라마 속 천하제일 검객 척사광으로 배우 한예리를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가능한 배우의 얼굴로, 어떤 곳이든 오를 수 있는 단단한 몸으로 한예리는 작고 큰 고비들과 짧지 않은 능선들을 묵묵히 견디고 지나왔다. 한예리가 몸으로 익힌 언어들과 독립 장·단편영화들을 통해 쌓아 온 배우로서 시간의 궤적은 마치 바람이 스친 들판의 모양처럼 아름답다. 무엇보다 배우로서 그녀의 태도는 예리하고 믿음직스럽다. 영화 '미나리'를 통해 포커스를 받고 있는 그녀가 얼마 전 인터뷰에서 했던 이야기가 가슴에 남았다. '영화는 혼자 만드는 작업이 아니다. 나를 축하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한 결과물에 대한 칭찬으로 받아야겠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하며 쑥스러워하던 이 배우가 운이 좋았다라는 단단한 겸손 위에서 더욱 높이 날고 멀리 가는 기회를 기꺼워하길 바란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