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과 거짓말', '해피 뻐스데이'를 통해 독립영화와 통속극의 한계를 끝까지, 온몸으로 체험한 결과물을 내어 놓았던 이승원 감독의 작품 '세자매'는 그의 전작들과 결을 같이 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이 나는 작품이다. 전작들이 가진 다짜고짜의 뜨거움과 난데없는 서늘함은 여전했지만 '세자매'는 좀 더 축축한 느낌이 들었다. 이 영화는 약간 흥건한 정서가 있는 블랙 코미디이자 격렬하면서도 끈끈한 가족 드라마였는데 뭔지 모르게 애잔했다. 아마 이 불타는 집에 물을 뿌리는 사람 덕분이었던 것 같은데 그 사람이 바로 세자매의 둘째 미연 역할을 맡은 배우 문소리였다. 그렇다 문소리. 배우 문소리는 '세자매'의 제작자이자 프로듀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세자매'는 이승원의 작품인 동시에 문소리의 작품이기도 하다. 20년 차가 넘은 월드클래스의 배우가 독립영화의 지휘자로 다시 도전의 문턱에 선 것이다. 역시 문소리였다. 불을 뿜으면서 물을 뿌릴 수 있는 배우.
'세자매'의 미연은 이를테면 생활형 광기를 매 순간 장착하고 가족이라는 불협화음의 집단의 일원들이 솔로곡을 부를 순간을 애써, 굳이 만들어내는 인물이다. 성가대의 지휘자인 동시에 두 가족의 조율사인 그녀는 외줄 타기 하듯 위태로운 허영과 스스로가 부여한 막중한 책임감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거의 상황극에 가까운 수많은 난관 앞에서도 미연은 특유의 확신으로 돌파구를 찾아내는데 이 버거워 보이는 캐릭터는 온전히 배우 문소리의 설득력으로 완성된다. '와, 저걸 해낸다고?' 영화를 보는 내내 문소리가 놀랍고 무서웠다. 그녀가 입을 열 때, 대사를 말할 때, 눈을 크게 뜨고 다시 닫아 버릴 때 문소리는 작품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아, 이런 것을 '육화'라고 하는구나. 그래 '문소리'라는 통째가 작품 안으로 들어간 것이구나.
'박하사탕'과 '오아시스'라는 이창동 감독의 작품을 통해 스크린에 얼굴일 비춘 배우 문소리는 이후 홍상수 감독의 '하하하'와 '자유의 언덕',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박찬경 감독의 '만신', 임상수 감독의 '바람난 가족'과 '하녀'를 통해 국내는 물론 해외 유수 영화제에 한국을 대표하는 배우로 이름을 널리 알린 배우다. 캐릭터에 밀착하는 생활감의 달인인 동시에 누구도 짐작하지 못한 세계로 관객들을 순간 이동시키는 강렬한 트랜스포머인 배우 문소리는 최근 '메기'와 '보건교사 안은영'을 선보이며 누구의 얼굴도 아닌 문소리의 얼굴로 보는 이를 긴장시킨 바 있다.
아주 침착해 보이지만 굉장히 예민하기도 한 그 순간의 문소리를 떠올려본다. 대체적으로 그녀가 정지해 있을 때 우리는 안심 비슷한 것을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도약 직전의, 무언가를 낚아채기 직전의 문소리이기 때문에 결코 정적이지만은 않다. 예열 중의 고요다. 문소리의 필모그래피 중 '리틀 포레스트'와 '사과'라는 다소 얌전해 보이는 작품들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소리는 일단 차분한 태도로 안심을 시킨 후 전형성과는 거리가 먼 곳으로 인물을 데려가는 배우다. 차분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착각이다. 그것은 코미디 장르인 '스파이'나 '관능의 법칙'에서도 마찬가지다. 문소리는 한순간도 수동적이지 않다. 그녀가 준비하고 있는 것들은 이미 그녀의 몸 안에서 꿈틀거리고 그 운동성은 눈동자와 입술로 빠르게 전달된다. 그러니까 스크린을 통해 문소리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릴 때 관객들은 활자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신나게 발산하는 배우의 퍼포먼스를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것은 주성치의 코미디나 성룡의 액션을 보는 것과도 같다. 문소리가 눈을 딱! 뜰 때, 문소리가 입을 확! 열 때 기대했지만 기대와는 다른 파열음을 듣는 일을 늘 짜릿하다.
많은 사람들이 문소리를 연기력이 뛰어난, 예술영화의 배우로 인식하고 있지만 문소리는 좀 더 강력하게 목소리를 내는 타입의 배우다. 그녀가 연출하고 주연을 맡은 '여배우는 오늘도'는 어마 무시한 코미디인 동시에 배우인 문소리가 일필휘지로 완성한 에세이 같은 영화다. 분명 자전적 요소가 담겨 있는데 문소리는 자신의 서사를 극화시키는 데에도 탁월한 재주를 지닌 창작자임을 이 작품을 보면 단박에 알 수가 있다. 마음의 소리를 가지고 보는 이의 웃음소리를 이끌어내는 문소리의 감독 데뷔작 '여배우는 오늘도'는 여러모로 흥미롭다. 뛰어난 배우이지만 특별한 감독으로서 문소리 감독의 차기작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부탁드립니다 문 감독님.
그래서 어디선가 문소리가 들릴 때 나는 긴장이 된다. '아가씨'에서,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메기'에서 그녀는 일상복을 입지 않는 것만으로도 어떤 판타지 세계의 고수 같은 느낌을 풍겼다. 어서 오라는 음성이 들릴 때는 이미 발을 들여놓은 다음이었다. 영화라는 세계로 들어올 준비가 되었냐는 질문을 던지는 배우, 소중할 수밖에 없다. '세자매'의 미연은 자신의 세계뿐만 아니라 가족이라는 타인의 세계까지 짊어지고자 부단히 노력을 하는 인물이다. 안쓰러운 동시에 믿음직한, 못 본채 하지 않고 손을 내미는 인물. '세자매'의 클라이맥스에서 미연이 터뜨리는 사자후는 심지어 스완 송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문소리가 여기에서 멈출 리는 만무하니 과몰입한 관객의 억측이 당연할 것이다. 다만 극의 안과 밖에서 저리도 부지런히 스스로를 채울 수 있나 싶어서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부디 손을 내미는 그녀의 순간들을 많은 이들이 부여잡았으면 좋겠다. 이미 다들 그러고 있으실 텐데 이것 또한 팬으로서 넘치는 애정이 흘러내린 괜한 걱정이 아닐까 한다. 뜨거움과 서늘함 사이 축축함으로 영화를 채우고 자신의 직업과 직업이 속한 산업의 영역에까지 성실한 질문을 멈추지 않는 배우, 문소리가 계속된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