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관 감독의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을 종로에 있는 독립영화전용관 인디스페이스에서 보았다. '아무도 없는 곳'은 서촌과 남산, 광화문과 종로 등 서울의 한 복판을 영화 속에 담아낸 바 있는 김종관 감독의 공간성이 여전히 유효한 작품이어서 오래된 극장을 들고 나서며 익숙한 그 집 앞을 다녀온 듯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 '조제' 등 도심 속 인물들의 동선을 사려 깊게 관찰하는 김종관 감독의 작품들에는 늘 익숙하고 낯선 서울의 골목들이 발견되고 존재해왔다. '최악의 하루'에서 낯선 이방인들이 마주치는 한낮의 골목, '더 테이블'에서 오래 전의 인연과 재회하게 되는 한적한 골목 그리고 '조제'에서 알지 못하는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는 입구가 되는 낯선 골목까지 그의 작품 속 골목들은 일상적이지만 비밀스럽게 인물들 앞에 등장해 왔다. 이를테면 갑자기 훅하니 불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찾다 발견한 곳에 있는 것처럼. 쉬이 미루어 짐작하기 어려운 도시의 미로이기도 한 골목들은 김종관의 영화 속에서 한 사람의 여정이 시작되는 초입이 되기도 했고 낯선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치는 길목이 되기도 했다. 때로 그 골목에선 마음들이 짝을 찾아 연인이 되기도 했고 오해들이 보폭을 맞추지 못해 남남이 되기도 했으며 고양이가, 꽃잎이, 버려진 가구와 서늘한 바람이 제 자리를 찾아 머물다 가기도 했다.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의 이야기 역시 골목에서 태어나고 머무르고 헤매다 결국 관객들에게 도착하는 감독 김종관의 인장이 또렷한 영화다. 소설가인 주인공 창석이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 그 대화가 간직한 시간, 대화의 시간 속에서 다시 태어나는 이야기들을 연작 소설처럼 담아내고 있는 영화 '아무도 없는 곳'은 이야기의 골목이란 어디일지 혹은 무엇 일지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이야기를 지어내는 과정에서 골목이란 상상이 막히는 지점이 되기도 하고 혹은 기억이 끊기는 지점이 되기도 할 것이다. 또한 막다른 골목에서 돌아 나오는 일도, 예측하지 못한 다른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일도 예상치 못한 극의 재미로 활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이야기가 예측 불가능한 지점으로 방향을 틀 때 창작자의 동행인, 보고 듣는 관객들은 자세를 가다듬고 기분 좋은 긴장을 하기 마련이다. 어라, 여기는 모르는 길인데, 자 이제 어디로 갈 건데? 너만 알고 있는 특별한 곳으로 날 데리고 갈 건가?
이야기가 듣는 이를 어딘가로 데리고 간다면 골목은 오로지 가이드에 마음 편히 의지해야 즐거울 수 있는 공간이다. 믿을만한 가이드를 만나지 못한다면 혹은 가이드를 믿지 못한다면 골목의 이야기는 호러와 스릴러 장르 속 불안의 공간일 수밖에 없다. '추격자'라든가 '범죄도시' 같은 장르물 속 골목들이 이내 떠오르지만 그 골목에는 누구와도 가고 싶지가 않고 혼자도 갈 마음이 없다.
골목은 또한 여러 사람이 동시에 존재하기 어려운 공간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가까운 거리에서 부딪히는 인물들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너와 나의 거리를 좁히는 일, 그래서 마음의 스킨십을 만들어 내는 공간인 골목, 어쩌면 골목을 함께 걷는 인물들을 만들어내는 일은 두 마음이 만나는 지점을 기록하고 싶은 창작자의 중매이기도 할 것이다. 앞서 말했듯 장르물 속에서는 한 사람의 어깨 너비로 꽉 차는 좁은 골목은 추적극을 벌이기에 무척이나 좋은 공간이지만 나는 골목에서 숨이 차게 뛰고 싶은 마음이 없는 관객이다.
다행스럽게도 '아무도 없는 곳' 속의 골목은 바람으로 등을 떠미는 정도의 속도로 따라 걸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시간이 내려앉은 곳, 뒷모습으로 짐작할 수 있는 사연의 무게들, 그리고 걷는 이가 바라보는 방향과 태도가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데가 있어 걷는 이가 걸어오는 이야기를 믿게 만드는 영화였다. 나는 이 영화의 엔딩 장면을 무척 좋아하게 되었는데 그 장면 역시 골목의 정경을 담고 있었다. 좁은 골목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두 사람이 나란히 놓일 수 있다면 어떤 자세와 태도를 취해야 하고 그것을 바라보는 이는 어떤 기다림의 마음을 견지할 수 있는가에 대한 느리고 마법 같던 그 장면은 작품의 제목을 다시 생각해보게 했다.
'아무도 없는 곳'은 누군가 머물렀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었던 곳이 아닐까. 아무도 없지만 거기에 있었던 마음들이 시간을 이겨 짙게 드리워진 그림자로 남았고 애써 그 그림자를 따라 걷는 영화가 '아무도 없는 곳'이다. 아직은 서늘한 기운이 남아있는 봄밤은 이 영화의 골목들이 걸어오는 이야기를 따라 걷기 좋은 시간일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다른 골목을 걸어보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보는 것 또한 흥미로운 밤 편지를 쓰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