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훈의 한라시론] 제주의 푸른 밤

[김양훈의 한라시론] 제주의 푸른 밤
  • 입력 : 2021. 07.01(목)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이 세상에 영원한 건 변화밖에 없다는 말이 있다. 정말 고향은 마음속에나 있는 것일까? 타향을 떠돈 지 50년이 된 출향인(出鄕人)은 텐트와 슬리핑백, 취사도구를 욱여넣은 백패킹 차림으로 기어이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60대 지나기 전 제주올레 완주는 나의 버킷 리스트였는데 막바지 시간에 쫓기고 있었다. 칠십을 한 해 앞둔 노인 패커는 1코스부터 차례로 걷기로 했다. 제주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한 201번 버스는 한 시간 반 만에 시흥리 정류장에 도착했다. 길바닥에 내려 첫걸음을 옮기자 묵직한 배낭의 무게가 어깨에 전해졌다.

제주의 6월은 보리장마철이 아니던가, 올레길은 안개가 자욱했다. 우도 코스를 걷는 내내 우도봉 등대는 뚜우 뚜우 무적(霧笛)을 울렸다. 첫 야영지 우도(牛島) 속 섬 비양도는 우리나라 백패킹의 삼대 야영 명소로 유명하다. 새벽 안개가 걷히지 않아 다음 날 새벽 일출의 장관을 기다리던 야영객들은 아쉬워했다.

마음 편한 야영은 우도의 비양도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 걸었던 코스에는 야영지 이용제한이니 취사금지니 하는 빨간 글씨의 안내문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다. 표선해수욕장에선 할 수 없이 정자 지붕 아래서 슬리핑백만 펴고 잠을 잤다. 마지막 야영지였던 하모해수욕장은 저녁이 되자 화장실은 문이 잠기고, 수도꼭지는 물이 말라버렸다. 매정함을 느꼈다.

안락한 숙박을 마다하고 야영장을 찾는 여행자들은 여러 부류였다. 배낭을 멘 백패커부터 자전거 여행족, 오토바이와 차박족, 그리고 캠핑 캐러밴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기본적인 숙영 장비와 취사도구를 등에 메고 길을 걷는 백패커는 가장 원시적이다. 그래서인가, 홀로 길을 걷다 만나는 사람들은 큰 나이 차이에도 서로에게 스스럼이 없다.

오산에서 왔다며 자신을 취준생이라 소개하는 20대 후반 백패커를 서귀포 올레스테이에서 룸 메이트로 만났다. 새로운 진로를 찾기 위해 여행 중이라고 했다. "길은 좀 찾아지던가요?" 게스트하우스 1층에 차려진 펍에서 함께 맥주를 마시며 그에게 물었다. "아직은요, 대신 길을 잃고 헤매다 푸른 밤을 봤어요." 청년은 눈빛을 반짝이며 길 잃은 그 밤 이야기를 이어갔다.

상념에 젖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길을 걷다 어둠을 만난 그는 도둑고양이처럼 초조하게 발길을 재촉했지만, 민가의 불빛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 길을 잃으면 무섭고 두렵지만, 걸음을 멈추는 것도 지혜다. 풀밭에 더듬더듬 텐트를 치고 나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푸른 밤하늘에 별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나희덕의 시 '푸른 밤'이 떠올랐다고 했다.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그 무수한 길도/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을 것이다.(중략)

제주의 푸른 밤은 그에게 위로였다. 길을 잃었다고 상심할 필요가 없음을 깨달았다며 말을 끝낸 청년은 슬픈 듯 선한 미소를 지었다. "실연을 당한 게로구먼!" 짓궂게 놀리는 나에게 그는 아니라고 하지 않았다. 슬픔은 소중한 무엇의 부재(不在)라 할 것이다. 올레의 반을 걸을 때까지 제주의 푸른 밤을 보지 못한 나는, 남겨진 절반의 올레길을 걸을 9월에는 그 청년처럼 밤길을 잃고 헤매어볼 생각을 했다.

<김양훈 프리랜서 작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8240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