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사람이 하는 일

[영화觀] 사람이 하는 일
  • 입력 : 2021. 07.09(금) 00:00
  • 김도영 기자 doyoung@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

밤 9시 뉴스를 시청한다는 것은 하루치 고단함을 몇 곱절로 만드는 일이다. 매일의 하루, 세상 모두에게 생겨난 새로운 소식들이란 어찌 이리 분통이 터지는 일들 뿐인지 차가운 물 한 잔을 옆에 두고 나서야 한 시간 가까운 울화통의 이야기들을 가까스로 넘길 수 있다. 늘 그렇지만 뉴스 화면 속에서 정치인들은 입으로 싸우느라 정신이 없고 노동자들은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사망 소식으로 뉴스에 오른다. 전자는 지겹고 후자는 고통스럽다. 넥타이에 양복을 차려 입고 벌게진 얼굴로 흥분한 정치인들을 보고 있자면 한숨이 나온다. 저렇게 온 힘을 다해 열심히 싸워 댈 시간에 죽어가는 단 한 명이라도 구하지, 차라리 슈퍼맨이나 배트맨처럼 변신이라도 하지 기도를 다 할 정도다. 마블의 영화가 유독 대한민국에서 인기가 많은 이유를 너무 알 것만 같다.

 최근 몇 달 간의 뉴스도 여전히 처참했다. 산업재해가 이렇게 쉬지 않고 발생하는 나라에서 자연에서 기인한 재난 영화는 왜 만드는 걸까 의문이 들 정도로. 쿠팡 물류 창고의 열악한 현장에서 소방관이 순직했고 실소도 나오지 않는 시험에 시달린 서울대 청소노동자도 휴식이 허락되지 않는 휴게실에서 사망한 채 발견됐다. 쿠팡은 노동자들의 기계적인 적응과 그로 인한 작업 효율을 위해 인간이면 당연히 처리해야 할 수많은 생리적 현상들을 차단시키는 최악의 수를 선택했고 서울대는 업무와 무관한 요상한 갑질로 노동자를 희롱하며 아무것도 아닌 자신들의 권위를 기어코 가르치려 들었다. 두 사고를 뉴스로 접하며 찬물을 화면에 뿌릴 뻔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아니 일어나 버렸다. 쿠팡에서 회원 탈퇴를 하고 어플을 지웠고 사용하고 있는 SNS 계정마다 서울대 청소 노동자의 원통한 죽음을 전달하고 있지만 이것이 과연 분노로도, 애도로도 합당한 행동인지 잘 모르겠다. 쿠팡과 서울대라는 이름만 바뀌었을 뿐 나는 거의 몇십 년 가까이 이런 재난들을 옆에서 앞에서 뒤에서 봐왔다. 이 허망한 불구경이 언제쯤 끝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떻게 이 화를 멈출 수 있을까.

 이태겸 감독이 연출하고 유다인, 오정세 배우가 출연하는 영화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는 110여분의 러닝 타임을 오롯이 노동자의 순간과 감정으로 채우는 영화다. 7년간 근무했던 회사에서 하청 업체로 파견 명령을 받은 정은. 본사 사무직에서 지방 현장직으로의 갑작스런 발령은 해고라는 이름과 다름 아니다. 정은은 낯선 공간 안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자리를 찾아보려 하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불편해하고, 베테랑 직업인이라도 매번 긴장하게 되는 송전탑의 노동자로 살아가는 일은 정은에게 결코 녹록지 않다. 낯설고 힘든 새로운 일보다 더 괴로운 것은 내가 나를 해고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마주하는 일이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정은의 한 걸음 씩이 허공에 흔적을 남길 때 이 영화는 밥벌이의 지겨움을 넘어서는 존엄의 자취를 남긴다.

 이 영화는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한 여성의 고군분투이기도 하고 바닥까지 내려간 한 인간이 꼭대기로 오르는 감동적인 성장담 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영화에는 쾌감이 부재한다. 의도적으로 배제돼 있다고 보는 편이 맞는 것 같다. 극의 윤활유가 될 유머도 없고 아름다운 풍광은 언뜻 보이지만 그 그림 앞을 늘 사람이 막아서서 관객이 풍경을 보고 감상에 빠질 찰나도 없다. 오히려 이 영화는 거칠거칠한 감각들을 관객들에게 들이민다. 주인공 정은의 성마른 얼굴과 바싹 마른 입술, 물기 없이 건조하게 흔들리는 인물들의 동공, 낡고 오래돼 먼지와 시간의 흔적이 가득 묻은 작업복, 날카롭게 솟아올라 미동도 없이 세워진 송전탑의 서늘함이 이 영화의 얼굴이고 표정들이다. 이 영화 속의 표정들을 보며 내가 되는 꿈을 꾸었던 '노매드랜드'의 펀이 떠오르기도 했고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하던 '삼진그룹영어토익반' 속 친구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했다. 직업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일을 하며 나 자신을 마주한다는 것의 어떤 불가사의함을 우리는 모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는 일을 한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실수가 있을 수 있고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기계처럼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이 하는 일, 자신과 동료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사람의 일들이 더 크고 높게 빛나기를, 그래서 정의와 존엄이라는 근사한 말들이 매일 노동의 일상에서 반짝이기를 바란다. 좀 더 나은 세상을 믿으며 허공으로 한 발짝을 내딛던 '나는 나를 해고하지 않는다'의 정은을 기억하며 나 또한 뒷걸음질 치지 않기를 바란다.

<진명현 독립영화스튜디오무브먼트 대표>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5962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