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이번 역은 이수경입니다

[영화觀] 이번 역은 이수경입니다
  • 입력 : 2021. 09.17(금) 00:00
  • 이정오 기자 qwer6281@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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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적'에서 이수경이 연기한 보경.

9월 15일 추석을 앞두고 개봉한 이장훈 감독의 영화 '기적'은 명절에 잘 어울리는 따뜻한 가족 영화다. 기차가 서지 않는 마을에 간이역을 만들기 위한 소년의 간절한 노력과 그를 둘러싼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1986년 시골 마을이라는 시대적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작품은 꼭 백반 정식을 닮았다. 차림은 단출하지만 정갈한 맛을 내는 노포의 한 끼 같이 개운한 포만감을 주는 이 영화 '기적'의 깊은 맛은 무엇보다 배우들로부터 우러난다.

 영화 '파수꾼'을 시작으로 '동주', '그것만이 내 세상', '사바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필모그래피를 선보이는 배우 박정민의 변신술은 '기적'의 준경 역할에서도 인상적인 유효타를 기록한다. '기적'은 수학과 과학에 특화된 천재 소년 준경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배우 임윤아가 연기한 준경의 여자 친구 라희가 극의 초반을, 배우 이수경이 연기한 준경의 누나 보경이 극의 중반을 그리고 배우 임성민이 연기하는 준경의 아버지 태윤의 극의 후반을 담당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는 주인공 준경을 중심으로 파트너를 바꿔가며 이중창을 선보인 후 전체적인 하모니로 이어지는 흐름으로 관객들을 설득한다. 풋풋한 설렘을 주는 첫사랑 이야기로 시작해 예기치 못한 반전으로 시선을 사로잡고 찬찬히 누적된 요소들이 마침내 진한 눈물을 쏟게 만드는 영화인 '기적'은 코미디와 신파를 결합한 전형적인 가족 영화와는 조금 다른 결을 보여준다. 그 신선한 결은 소년 준경과 그의 누나 보경이 중심을 이루는 극의 중반부에서 만들어진다.

 처음 배우 이수경이 박정민의 누나 역할로 등장한다고 했을 때 갸우뚱했다. 두 배우의 나의 차이가 10살 가까이 나는데 누나 역할 이라니? 나는 이 남매 캐스팅 개연성에 의문을 안고 영화를 보다가 어느 순간 그만 화들짝 울어버렸다. 그건 이해나 설득의 영역이 아니라 마치 책 속에서 툭 떨어진 오래된 가족사진을 발견 했을 때, 잊고 있던 유년 시절 절친의 전화가 걸려 왔을 때의 설명할 수 없이 반갑고 아득한, 맑은 슬픔 같은 타격감이었다. 박정민이 능청맞은 필치로 슥슥 준경을 그려낼 때 이수경은 그 스케치 위에 색을 입힌다. 까맣고 동그란 눈동자, 다무진 입매와 단발머리를 하고 몇 벌 안 되는 의상을 입고 자유롭고 자연스럽게 극의 완급을 조절하는 배우 이수경은 여러 차례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기적'에서 이수경이 연기한 보경 캐릭터는 작품이 익숙한 첫사랑 멜로나 부자 관계의 휴먼 드라마로만 보여질 수 있는 기시감에 마법 가루를 뿌리는 역할이다. 보경과 배우 이수경 덕분에 '기적'은 로맨스, 휴먼 드라마, 판타지, 성장 영화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드는 추동력을 얻는다. 선로를 벗어나진 않지만 선로를 연장시키는 그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배우 이수경을 처음 본 것은 영화 '차이나타운'에서였다. 강렬한 핑크 머리의 쏭을 연기한 이수경은 말 그대로 시선을 사로잡는 연기를 보여준다. 흔들림 없는 또렷한 눈동자와 시선을 돌리기 어려울 정도의 집중력으로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공력은 신인 배우의 그것 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였다. 배우 이수경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을 도발적인 폭발력은 영화 '침묵'과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서도 이어진다. 공처럼 튀어 오르는, 불처럼 뜨거운 그의 등장은 극의 분량과 상관없이 흔적을 남겼다. 단독 주연을 맡은 영화 '용순'에서는 특유의 뜨거움에 청량함을 더하며 스펙트럼을 넓혔고 올해 방영된 드라마 '로스쿨'에서는 차가운데 뜨거운 것도 가능한 전천후임을 입증한 바 있다. 마침내 '기적'에서 이수경은 지금까지의 필모그래피와는 전혀 다른 또 다른 인장을 새긴다. 현실의 뛰쳐나갈 것만 같던 소녀는 어느새 현실에 머무는 법을 터득하는 어린 어른이 됐다. 영화 '동주'가 배우 박정민의 터닝 포인트였다면 '기적'은 배우 이수경의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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