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4)작은 정원 관리사의 시간

[황학주의 제주살이] (4)작은 정원 관리사의 시간
  • 입력 : 2021. 10.05(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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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 있는 미술 같은 풍경
가지 사이로 햇빛 떨어지면

살아 있는 것들의 색 몸 떨고

며칠에 걸려 마당의 풀을 매는 것에서 시작해 잔디를 깎고 여름 동안 미루던 전지 작업을 했다. 훤해진 마당을 고양이 루코와 아루가 먼저 지나다닌다. 정원을 가꾸다 보면 자주 눈이 가는 방향이 있다. 아무리 가까워도 나무와 나무 사이에는 거리가 있고, 그들도 눈치가 있다. 그들도 서로 바라보는 곳이 있다. 나는 마당에 책상과 의자를 놓고 보고 있다.

우리집 담장을 두르는 나무는 동백, 담팔수, 왕벚나무, 야생무화과, 소나무 등이며 대나무는 이웃과 경계하는 북쪽에 치우쳐 줄지어간다. 내 시에 자주 등장하는 나무는 현관 가까이 서 있는 2미터 높이의 올리브나무이다. 올리브나무 한 그루만 키웠으면, 하던 오랜 소망은 올리브 나뭇잎이 가진 '숨은 초록'의 매력 때문이었지만, 대바람 소리를 듣고 싶어 맹종죽을 심은 것은 정말 만년(晩年)은 귀가 닫히지 않아야 한다는 바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집 입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연못이 모서리에 있다. 수련과 두어 가지 수초가 자라고 그 밑에서 노는 물고기 몇 마리가 가끔씩 눈에 비친다. 연못을 둘러싼 돌들에 착생하는 이끼는 왕벚나무와 야생무화과의 그늘 밑에서 번식을 계속하고, 폭염에 타버린 일부도 이런 가을이면 봄풀처럼 다시금 싱그러워진다. 이끼는 연못 둘레에서 깔린 돌들을 따라 묵은 담장 위로 올라간다. 그 사이사이에 콩짜개나 작은 양치식물들을 데리고 퍼진다. 나는 이끼를 인위적으로 채집해 붙이거나 연출하지 않는다. 왼발이 조금 나아가듯 바른발이 조금 나아가듯 번식하는 그대로를 보며 이끼 속에서 올라와 덩치가 커진 풀을 뽑아주거나 한 번씩 물을 주는 것 말고는 하지 않는다. 세월도 못 되고 풍경도 못 된 그런 세월도 지나고 풍경도 지나며 우리가 함께 지나온 시간들, 정원은 무엇을 알고 있을까.

정원엔 여러 미술 같은 풍경이 있다. 햇빛이 가지 사이로 떨어지면 잔물결이 일듯 살아 있는 것들의 색은 일제히 몸을 떤다. 나는 화단 한쪽에서 마치 아랑곳없다는 듯이 안경알을 닦으며 책장을 넘긴다. 그렇지만 온도가 몇 도 떨어질 때까지 사실은 색이 더해지고 나눠지고 사라지기도 하는 정원 주위를 조심스레 보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흰눈처럼 풀씨 날리는 벤치에 앉아 서로의 무릎 위에 다소곳이 마른 손을 포개고 있던 노부부는 지금 어디로 갔을까. 10월의 햇빛은 잔디와 돌들의 뿌리에 닿고, 고양이의 발끝까지 보드랍게 내려간다. 정원의 모든 가을꽃들의 낮잠 속으로 함께 들어가려는지 나비 한 마리가 수풀 아래로 간다. 상한 영혼이 꽃대처럼 흔들릴 때 사랑을 더하고 싶은 것뿐인데 이렇게 맨발로 정원을 딛는 정원사의 시간은 속절없이 가고 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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