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항쟁120주년기념사업회 학술대회서 박찬식 소장 제기
"탐라 멸망 후 연면히 흘러온 공동체적 움직임 4·3에도 영향"
주진오 교수 "당시 국가는 없었다… '신축' 간지 사용 재고해야"
입력 : 2021. 10.09(토) 08:31
진선희기자 sunny@ihalla.com
8일 4·3평화교육센터에서 신축항쟁120주년기념사업회 주최 학술대회 토론이 진행되고 있다. 진선희기자
제주사람들의 탐라복권의식이 '신축항쟁'을 통해 부활했다는 의견이 제기됐다. 신축항쟁120주년기념사업회, 제주도, 제주민예총이 8일 4·3평화교육센터에서 진행한 '신축항쟁, 지역의 기억과 역사적 진실' 주제 학술대회에서 박찬식 제주역사연구소장은 이같이 밝혔다.
그동안 '신축항쟁'(신축교안, 제주교안) 관련 연구를 꾸준히 벌여온 대표적인 학자인 박찬식 소장은 이날 '저항의 제주 역사로 본 신축항쟁' 주제 발표에서 "제주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 수없이 일어난 민인들의 저항 움직임에서 외부 세력이 미치는 영향과 더불어 섬 내부의 역사문화적 동인에 의한 특징을 주목할 수 있고 거기에는 탐라해상독립국의 명멸이 자리 잡고 있다"며 "즉 집단 저항의 움직임이 탐라국 멸망과 때를 같이하여 일어났고, 이후에도 장기지속적으로 탐라국 독립과 자치에 대한 집단적인 감성과 기대심리가 잠복해 있다가 표출되곤 했다"는 점을 짚었다.
박 소장은 탐라복권의식이 투영된 사건으로 고려시대의 경우 1168년 양수가 주동한 반란, 정부권을 외면하고 삼별초 반란군을 해방군으로 맞이한 사실, '목호란'에 대거 동참했다가 정부 진압군에 몰살당했던 사례를 들 수 있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소덕유·길운절 반란' 사건에 문충기 등 토호가 가담했던 일, '양제해란'을 탐라국 독립 거사로 조작했던 사례, '방성칠란' 때 '탐라왕족' 고여송을 왕으로 세우고자 했던 사실 등이 있다.
그는 1901년 '신축항쟁'에서도 탐라복권의식의 조각들을 엿볼 수 있다며 김원영 신부가 1900년에 작성한 천주교 교리서 '수신영약'을 제시했다. '수신영약'에는 당시 제주공동체를 수호하는 뚝할망신, 한라산신들의 존재가 확인되는데, 제주민들이 탐라국을 지키는 호국신이라고 여기는 한라산신을 모시는 광양당의 광양왕과 고려시대 제주 지맥을 끊으러 왔다는 호종단과의 대결 모습이 연상되는 내용이 나온다. 광양당은 훼철되어 버렸지만 200년 뒤 한라산신과 광양왕신, 즉 탐라호국신은 '신축항쟁' 과정에서 제주민들의 마음 속에 이재수를 통해 부활했다는 것이다. 미국인 고문관 샌즈도 제주 섬을 "독립의 전통뿐만 아니라 여러 이상한 관습 때문에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고 했고, 제주민들을 "조선으로부터 독립을 바라는 해묵은 사람들", '이재수란'을 "섬 주민 전체가 동의한 반란"이라고 표현했다.
박 소장은 "신축항쟁에서 부활한 탐라복권의식은 일제강점의 시기인 1918년 법정사 항일투쟁으로 이어졌고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민족주의·사회주의 등 근대 신사상에 근거를 둔 항일운동 이면에도 공동체 자치관념이 잠재했다"고 말했다. 특히 그는 "해방 후 4·3항쟁 또한 민족주의·사회주의·국가주의와는 다른 해석이 필요할 듯 하다"며 "1947년 3·1투쟁과 3·10총파업, 1948년의 2·7투쟁, 4·3무장봉기, 5·10선거 거부투쟁 등에서 보이는 공동체적 움직임은 탐라 멸망 이후 연면히 흘러온 제주민 저항사의 귀결 지점인 1901년 '신축항쟁'과 연관시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앞서 '신축항쟁으로 제주 4·3으로' 를 주제로 기조 강연에 나선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결과적으로 1901년 당시 제주도민들에게 자신들을 보호해줄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며 국가는 프랑스와 천주교의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고, 양측을 중재하고 백성들을 보호해야 할 지방관도 전혀 역할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 민군과 교인들은 타협점을 찾지 못하고 대량살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라고 했다. 주 교수는 "1901년의 민중봉기로부터 47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제주4·3이 일어났고 두 사건 사이의 상관 관계는 파악되지 않지만 외부로부터 들어온 세력으로부터 제주도민이 부당한 억압을 받게 되면, 집단적으로 저항을 벌이는 방식에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다만 그 해결 과정에서 1901년에는 일단 국가권력에게는 저항을 피함으로써 대규모의 피해를 막을 수 있었지만, 1948년에는 그렇지 않았다는 차이가 있다"고 덧붙였다.
이날 주 교수는 사건 앞에 '신축'이라는 간지를 사용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의견도 냈다. 주 교수는 "60년마다 반복되는 신축년은 반드시 1901년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되기 어렵다. 특히 미래 세대들에게 신축년이라고 하면 전혀 느낌이 오지 않기 때문에 아예 1901년이라고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