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귀포 아우르는 서귀본향당 중심으로 공동체 형성
정방동 상징 ‘이중섭미술관’… 역작 그린 작가의 흔적샛기정·제석동산 등 마을 정체성 품은 문화자원 풍부민속보존회 창단하는 등 다양한 콘텐츠 만들기 열중
제주 사람들은 섬 가운데 불쑥 솟아오른 한라산을 중심 삼아 동과 서로 산을 에둘러가며 살아왔다. 1950m에 달하는 높은 산을 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지 산줄기를 따라 굽이돌며 살아온 결과가 동촌과 서촌이라는 인문지리적 경계를 탄생시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동촌과 서촌이 성성했던 시절을 살았던 옛사람들은 한라산의 남녘과 북녘을 다른 세상으로 인지했었는지 '산압산두'(산 앞 산 뒤)라는 레토릭을 만들었다. 서귀포는 산압, 제주시는 산두로 부르던 관념은 한라산이 만들어낸 마치 분리된 세상처럼 여겼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서귀포 칠십리라고 부르는 지리적 권역의 중심은 어디였을까? 서귀포의 옛사람들은 자신들의 고장을 '우알서귀'라고 불렀었다. 풀어 말하면 웃서귀(윗서귀)와 알서귀(아랫서귀)쯤 되겠다. 우알서귀를 오늘날 행정에 대입해보면 동홍동과 서홍동이 웃서귀, 서귀동 일대가 알서귀와 비슷하게 맞아떨어진다. 정방동은 알서귀에 해당되는 서귀동의 540~550번지 일대를 아우르는 법정동이다. 서귀동의 한복판인 셈이다.
서귀본향당 내부의 모습
정방동을 중심으로 한 오늘날 서귀포 일대에 사람이 정착한 것은 천지연폭포 인근의 생수궤만 보아도 오랜 내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마을과 도시의 위용을 갖추게 된 것은 선사시대로부터 시간을 훌쩍 건너뛴 조선 초기라고 한다. 세종임금 시절 서귀진이 설치되며 주변 마을들이 형성됐고, 다시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근대도시의 면모를 갖추게 된 것이다.
대개 제주의 마을들은 신앙을 중심으로 공동체가 형성돼왔는데 정방동에도 당연히 서귀포 일대를 아우르는 커다란 신앙권이 있으며 그 중심에 서귀본향당이 있다. 서귀본향당은 우알서귀, 즉 서귀동, 동홍동, 서홍동을 아우르는 신성들의 성소인데 이들의 사연은 그렇게 많다는 제주의 당신화 중에서도 가장 드라마틱한 서사를 지니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줄거리를 간추리면 이러하다.
이중섭미술관
한라산 설매국에서 스스로 솟아난 남신 일문관 바름웃도가 자신의 배필을 찾아 천기를 살펴보는 중에 멀리 비오나라비오천리 홍토나라홍토천리에 지산국이라는 아리따운 여신을 발견한다. 그 길로 지산국을 찾아간 바름웃도는 청혼해 성공한 뒤 그날로 초야를 치른다. 날이 밝은 뒤 바름웃도는 지산국의 언니이며 박색인 고산국과 초야를 치른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바름웃도는 지산국을 꼬드겨 야반도주하듯이 제주로 함께 도망친다. 화가 치민 고산국이 이들을 쫓아 한라산까지 날아들어 둘을 사로잡았다. 고산국은 둘을 죽이려고 했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고 땅을 가르고 물을 갈라 제각기 따로 살 것을 다짐받았다. 그리하여 고산국은 서홍동, 지산국은 동홍동, 바름웃도는 서귀동의 수호신으로 좌정하기에 이르렀다. 신화는 이렇게 우알서귀를 탄생시켰고, 오늘날 이중섭미술관 바로 곁에 바름웃도를 모신 서귀본향당이 자리해 있으니 서귀포의 시원이 서린 곳이라고 할 만하다.
샛기정 안내문
서귀본향당과 더불어 이중섭미술관이 자리한 이중섭거리는 정방동의 상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귀포의 명소로 각광받는 이중섭거리를 탄생시킨 주인공 이중섭이 이곳에 머문 기간은 1951년 1월부터 12월까지로 비교적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의 미술 생애 전체를 놓고 볼 때 대단한 역작들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피난살이의 어려움을 무릅쓰고 토해낸 열정은 '서귀포의 환상', '게와 어린이', '섶섬이 보이는 풍경', '길 떠나는 가족' 등 불후의 명작을 토해냈다. 이 가운데 '길 떠나는 가족'은 전란의 와중에 헤어져 한국과 일본으로 흩어진 부인과 가족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담아낸 작품으로 그의 실존적 번민과 미술적 성취를 동시에 드러내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정방동 문화지도
정방동에는 당연히 이중섭거리가 전부가 아니다.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온 민속생활사가 있고, 자연경관에 얽힌 전설을 비롯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깊숙이 잠복해있다. 이렇게 많은 사연들 중 서귀포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곳이 있으니 서귀읍 시절 읍민관이 자리했던 '샛기정'이다. 샛기정은 뱃머리동산과 이어지는 벼랑길로 천지연폭포까지 이어진다. 물이 귀하던 시절 이 샛기정의 벼랑길을 거쳐 생수궤의 물을 길어오는 것이 여성들의 고된 일과 중 하나였다고 한다. 해서 갓 시집온 새댁들이 이 고역을 도맡기 일쑤였는데 워낙 가파른 길인 탓에 물허벅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종종 깨뜨리는 경우가 있었다고 한다. 물허벅을 깨뜨리지 않고 샛기정길을 무사히 올라오는 며느리를 두고 많은 시어머니들이 '너는 서귀포에 태운 사름'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고 한다. 샛기정과 이어진 생수궤는 무려 기원전 25000년 전부터 고인류가 거주했던 공간으로 구석기시대의 유물인 좀돌날에서 신석기시대의 토기편까지 출토되며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선사유적으로 판명됐다.
제석동산 안내문
이밖에도 정방동주민자치센터 서쪽의 언덕 제석동산은 먼 옛날부터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석제가 이뤄졌던 곳으로 유명하다. 해방 이후에 만들어져서 오랫동안 정방동을 비롯한 서귀포 시가지의 식수원으로 이용됐던 소나무동산의 배수지터는 근현대의 사연을 품고 있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동홍동의 지장샘에서 물을 끌어다 배수지를 채웠다는 사실인데 앞서 살펴본 서귀본향당신화에서 땅 가르고 물 갈랐던 신들의 언약과 어긋난다는 점이다.
김보협(오른쪽) 동장과 강민정 팀장
이처럼 정방동에는 서귀포의 오랜 내력을 품은 명소들이 많은데 워낙 유명한 관광지이다보니 관광명소의 그늘에 가려져서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김보협 동장과 강치균 주민자치위원회 자문위원, 한기성 정방동협의회장 등이 의기투합해 이 마을의 명소와 역사문화자원을 소개하는 문화지도를 만들어서 무료로 배부하고 있으며, 각 명소마다 안내문을 비치해 깊은 내력을 알리고 있다. 김보협 동장과 담당 주무관인 강민정 팀장은 마을의 내력을 상세히 기억하는 원로들과 끊임없이 조우하며 마을 정체성 확보에 부심한다.
"2019년도에 민속보존회를 창단해서 서귀본향당신화를 주제로 마당극을 창작했죠. 민속보존회장이시기도 한 한기성 선생님과 더불어 많은 분들이 마을만들기사업의 첫걸음이 마을 정체성 찾기라며 열정적으로 움직이십니다. 아시다시피 서귀포의 신당 중에서도 가장 세력이 크다는 서귀본향당도 시 차원에서 매입해 세계자연유산본부에서 관리하게 돼서 신앙을 살리고, 그에 따른 다양한 콘텐츠를 만드는 일도 차근차근 진행할 계획입니다. 민속학자도 아닌데 강민정 팀장이 고생 많았죠."
정방동이라는 법정동 편제에 속한 뒤 급속하게 관광중심의 도심으로 성장하게 되면서 놓쳐온 것들이 눈에 밟혔던 것이다. 이들과의 만남에서 또 한 가지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알서귀를 사무치게 사랑하는 이들이 있는 한 마을의 정체성은 쉽사리 사위지 않으리란 것을.
글·사진=한진오(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