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순간을 믿어요

[영화觀] 순간을 믿어요
  • 입력 : 2021. 11.05(금)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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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쁘띠 마망'.

언젠가 먼지 쌓인 앨범을 뒤적이다 어린 시절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을 다시 보게 됐다. 나는 지금의 나와 닮은 꼬마였고 대부분의 사진 속에서 엄마에 기대어 서있거나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꼬마 곁에 있거나 그를 바라보고 있는 엄마는 젊었다. 지금의 엄마보다 좀 더 마른 듯했고 사진마다 머리 모양도 조금씩 다른 멋쟁이였다. 앨범에서 사진을 꺼내 핸드폰 카메라로 엄마의 얼굴을 확대해서 찍은 뒤 다시 저장하며 생각했다. 엄마를 다시 만나서 반가워. 엄마랑 나랑 같이 나이를 먹었다니 신기하고 이상하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진 속 엄마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만져보며 지금의 순간을 저 꼬마는 짐작하고 있었을까 궁금해지기도 했다.

 '워터릴리스', '톰보이',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등 여성의 서사를 탁월한 완성도로 만들어 온 셀린 시아마 감독의 신작 '쁘띠 마망'은 소녀 넬리가 자신과 같은 나이의 엄마 마리옹을 만나는 이야기다. 가을의 숲 속에서 펼쳐지는 이 신비로운 시간 여행을 마치 수채화로 그린 그림책처럼 선보이는 '쁘띠 마망'은 72분이라는 짧은 러닝타임 안에 풍성한 뉘앙스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영화는 요양원에 머물다 하늘나라로 떠난 넬리가 할머니와 이별을 나누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직 애도의 무게에 눌리지 않은 소녀는 요양원의 다른 할머니들, 공간들에 살가운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할머니의 유품 정리를 위해 할머니가 살던 집으로 향하던 차 안에서는 말없이 운전하는 엄마 마리옹의 입에 과자와 음료수를 넣어주고 슬픔에 잠긴 듯 보이는 마리옹의 목을 다정하게 끌어안는다. 이렇게 애도의 시간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는 모녀는 할머니의 흔적이 남은 집에 함께 도착한다. 그러나 곧 엄마 마리옹이 그 집을 먼저 떠나고 넬리는 아빠와 함께 할머니의 집에 남겨진다. 유품 정리로 바쁜 아빠를 집에 두고 넬리는 집 근처 숲 속을 걷다가 엄마와 같은 이름의 소녀 마리옹을 만난다.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엄마라는 강력한 정서적 소재를 중심에 둔 이야기들을 선보여왔고 시간 여행이라는 내용을 담은 작품들 또한 드물지 않았다. 셀린 시아마는 이 새롭지 않은 두 가지 소재를 씨실과 날실처럼 엮어 포근한 스웨터 같은 이야기를 완성해내는 영화적 마법을 선사한다. 평범한 털실로 만든 것 같은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패턴이자 빈티지의 애틋함과 클래식의 기품이 느껴지는 마법 같은 손길이다.

 나와 같은 나이의 엄마를 만나는 소녀의 이야기인 '쁘띠 마망'은 또한 애도의 시간을 유예한 두 사람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잘 이별하는 법에 대한 대화의 기록이자 지금의 마음을 긍정하는 치유의 포옹의 기억이기도 하다. 분명 판타지의 설정임에도 화려한 시각적, 청각적 효과에 기대지 않는 이 작품은 '마법 같은 순간'이 꼭 번쩍이는 질감으로 공간을 구현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현실의 틈에서 발견한 낯설지만 눈부신 감각의 채집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근사하게 보여준다.

 '쁘띠 마망'은 페이지 수는 많지 않지만 덮고 나서 그만큼의 시간을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그림책처럼 영화가 끝난 후 차분하게 내려앉는 무수한 감정들을 찬찬히 들여다보게 만든다. 나와 당신, 만남과 이별, 연결과 연대, 애도와 위로라는 정답이 없는 인생의 순간들을 최대치의 맑음으로 선사하는 이 작품은 작품 속 대사인 "다음 번은 없어"라는 명료한 선택의 말처럼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영화적 순간들로 충만하다. 전작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통해 노련한 유화 화가처럼 놀랍도록 섬세하고 유려하게 레이어를 만들어낸 셀린 시아마는 '쁘띠 마망'을 통해 가벼운 터치로도 눈부신 화폭을 만들어내는 대가임을 입증한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진다.

<진명현 독립영화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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