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10)서귀포극장에서 쓰는 편지

[황학주의 제주살이] (10)서귀포극장에서 쓰는 편지
  • 입력 : 2021. 11.16(화)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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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줄기가 설핏하게 지난 후 이중섭거리를 오릅니다. 오른쪽으로 솔동산 언덕배기에 올라붙은 낡은 건물이 어수룩한 모양새로 눈에 들어옵니다. 옛 이름은 서귀포관광극장이지요. 외관만을 보고 여행자들은 옛날 극장이네! 하는 단순한 생각으로 들어왔다가 깜짝 놀라곤 합니다. 건물 홀에 발을 들이자마자 바로 뻥 뚫린 하늘과 눈이 마주치기 때문이지요. 그들은 천장이 없는 줄 짐작지 못하고 들어섰다가 파란 하늘과 객석이 없는 계단과 담쟁이덩굴에 덮인 텅 빈 벽면 앞에서 비현실적인 공간의 아찔함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화재 시 내부가 소실되고 후에 태풍으로 함석지붕이 날아간 이 노천극장은 저에게는 사뭇 궁전과 같은 곳입니다. 극장 계단 가운데쯤 앉아 여기서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이유도 편지를 쓴다는 외로움이 가장 푸르러지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종종 와서 책을 읽거나 서울 사무실에 보낼 교정쇄를 보고 디자인 시안들을 궁리하는 저의 비밀스러운 공간인 이곳에선 어떤 경우에도 제 주위에 새소리 말고는 다른 소리 내는 것을 두지 않고 지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눈대중으로 높이 10미터가 넘는 눈앞의 벽면을 이렇게도 안온히 마주할 수 있으며, 담쟁이덩굴은 우측 벽면에서 계속 벋어 스크린이 있던 중앙 무대 앞을 지나 좌측 흘림체로 왼쪽 벽면을 곱게 따라갈 수 있을까요. 시간이라는 요정이 이 벽과 저 벽을 오가며 이파리를 물들이는 거라고 생각해봅니다.

지금 당신은 잠시 일 때문에 파리에 가 있고, 나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공간이지만 세월에 의해 자연적으로 재구성된 서귀포극장에 앉아 당신을 떠올립니다. 당신이 파리에서 보내준 사진은 어느 거리 카페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 두 손으로 눈을 가리고 웃고 있습니다. 분명히 당신이 갔을만 하다고 여겨지는 곳에 당신은 있으며 거기서 나를 유혹하고 있는 거지요. 지금 당신에게 이곳에서의 가장 중요한 기억과 그새 잊어버린 기억은 무엇일까 궁금해집니다.

통로 바닥 군데군데 패인 공간에 빗물과 이끼가 서로 물리고 섞인 채 있으며, 쓸모없어도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냥 있습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절대적으로 쓸모없는 공간, 그 무엇으로도 사용되지 않는 방 하나를 집에 두고 싶은 마음을 당신은 짐작할 수 있을 테지요. 나아가 내가 아무 쓸모 없는 사람이 되어도 좋다,고 말한다면 그 말뜻 또한 당신은 곧장 이해할 수 있을 테고요. 결여와 잉여 속에 살았던 세월은 흘러 많은 일들이 다시 되돌릴 수 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고적한 공간 안으로 해가 들었다 나갔다 하는 모습과 담쟁이덩굴 잎이 부스럭거리는 소리, 이어서 고인 물빛이 무엇엔가에 의해 보글거리는 걸 봅니다. 당신이 돌아오면 어디서 길을 물었으며 한 묶음의 꽃을 누구에게 주었고 예쁜 그릇을 어느 가게에서 찾았는지 하나하나 들려주세요.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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