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연말연초를 따뜻하게 데워준, 핫쵸코 같던 드라마 '그 해 우리는'이 종영했다. 전교 1등과 전교 꼴찌의 다큐멘터리가 역주행하면서 다시 사랑의 한복판으로 소환된 두 주인공 최웅과 국연수의 이야기를 다룬 이 드라마에는 계절의 질감들에 녹여낸 감정의 양감들이 손에 잡힐 듯 생생하게 그려져 있었다. 초여름 같이 부풀어오른 설레는 마음들을 지나 한겨울처럼 단단히 굳어버린 서운한 마음들 위로 다시 피어나는 몽글몽글한 첫사랑의 서사는 많은 이들의 공감과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나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어 좋았고, 사랑을 받을 수 있어 행복했고 그 사랑에도 타이밍이 있음을 끝내 알게 되어 가슴 아팠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첫사랑은 천하무적, 무쇠로 만든 그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결국 적절한 사랑의 온도 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달은 시간이기도 했다. 태어난 모두에게 첫사랑은 한 번 뿐이고 설령 사랑을 했던 내가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그 첫사랑이 소멸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첫사랑이 존재하는 것일까. 과학과 수학, 의학과 법학이 설명하지 못하는 첫사랑을 그나마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문학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첫사랑을 다룬 작품들은 대개 시어로 가득한 일기 와도 같다. '그 해 우리는'을 마음에 담으며 첫사랑을 다룬 두 편의 영화를 함께 떠올렸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남자는 괴로워' 등을 만든 이명세 감독의 1993년 작품 '첫사랑'은 제목 그대로의 감정을 아름다운 동화처럼 그려낸 영화다. 배우 김혜수의 앳된 모습을 마주할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한 이 작품은 첫사랑이라는 단어가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는 영화적 표현 기법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첫사랑'의 사랑은 짝사랑에 가깝다. 이 영화는 사랑의 상호작용 보다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탄생과 그 형상을 묘사하는데 공을 기울인다. 주인공인 대학교 1학년 영신은 연상의 연극반 연출가 선생님을 짝사랑하고 그와 몇 번의 데이트, 한 번의 키스를 하게 된다. 사실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선생님의 감정은 알 수가 없다. 사실 별로 알 필요도 없다. 영신의 감정을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충만하기 때문이다. 사랑의 감정에 취해 벚꽃이 흩날리는 밤길을 자전거로 내달리는 영신의 모습은 첫사랑의 행로 그 자체가 된다. 그 순간의 향기와 공기는 그녀가 느낀 순도 높은 감정의 입자들로 이루어진 것 같다. 이 달콤한 기운의 정체를 관객들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명세 감독과 배우 김혜수가 정성껏 만들어낸 장면들에 공감하기는 어렵지 않다. 하긴 첫사랑의 감정은 설득되는 종류의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 '첫사랑'을 떠올릴 때마다 이 영화의 공감각적 잔상에 감탄하게 된다. 어떤 영화를 향기로, 공기로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첫사랑에 대해 아직까지도 이토록 강력한 후각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영화를 나는 알지 못한다.
배우 전도연의 놀라운 연기를 만날 수 있는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은 첫사랑의 파열음에 관한 영화다. 마음에서 꿈틀거리며 터져 나오던 감정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이 영화 속 주인공 홍연은 17살의 늦깎이 초등학생이다. 홍연은 학교에 갓 부임한 21살의 젊은 선생님 수하를 짝사랑 하게 된다. 하지만 수하는 동료 교사 양은희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 같다. 표현에 서툰 정도가 아니라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홍연은 사랑의 감정과 질투의 감정을 동시에 느끼며 혼란스럽기만 하다. 수하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두고 그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홍연은 마치 사랑의 탐정처럼 분주해진다. 이 영화 속 명대사인 "선생님 근데 그때 왜 제 팔을 살짝 꼬집었습니까?"라는 홍연의 대사는 그녀의 의구심과 확신을 잘 이야기해준다. 당신이 보여준 모든 행동에 의미를 두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이고, 그 물음표를 알아 내고야 말겠다는 것이 그녀의 느낌표다. 순수해서 더 강렬하고 처음이기에 더 치열한 첫사랑의 물음표와 느낌표가 탄성처럼 터져 나오는 영화 '내 마음의 풍금'은 첫사랑의 서정으로 가득한 돌림노래 같은 영화다.
앞으로도 근사한 첫사랑의 서사를 다룬 작품들이 우리 앞에 도착할 것이다. 마치 겨울을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잎을 내고 꽃을 피우는 식물들처럼 말이다. 우리는 이 기운 센 첫사랑의 탄생 앞에서 마치 처음인 것처럼 다시 기쁘게 그 개화를 지켜보는 것으로 또 다시 행복해질 것이다.
<진명현 독립영화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