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난 내게 반했어

[영화觀] 난 내게 반했어
  • 입력 : 2022. 05.13(금)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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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레드 로켓'

'탠저린'과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통해 미국 독립영화의 거장이자 전 세계 예술 영화 팬들에게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션 베이커의 신작 '레드 로켓'이 소리 소문 없이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국내에 첫 공개된 '레드 로켓'은 일반적인 배급과 개봉 방식을 통해서가 아닌 국내 예술영화 전용관의 상영 방식을 통해 관객들을 만나고 있다. 전작인 '플로리다 프로젝트'가 전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고 국내에서도 좋은 성과를 거뒀기에 의외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막상 스크린을 찾아 영화를 관람하고 나니 전작을 기대한 관객들이라면 꽤 당황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드 로켓'은 글로 옮겨 쓰자니 매우 무안한 사건들의 연속인 영화다. 전성기가 지난 남성 포르노 배우 마이키의 귀향으로 시작되는 영화는 지칠 줄 모르는 철 모르는 욕망과 철없는 선택들이 이어지는 소동극이자 블랙코미디다. 영화의 수위가 상당하다. 마약과 섹스가 아무렇지 않게 등장하는 이 작품은 단 한시도 관객에게 느슨한 관람 태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장면의 길이가 매우 짧은 편이라 마치 탁구공처럼 날아오는 자극적인 장면들을 연속으로 보고 있노라면 그 자극에 무뎌질 정도다. 다만 그 자극은 전혀 에로틱한 뉘앙스를 풍기지 않는다. 극화된 감정이 아니라 다큐멘터리의 질감을 지닌 션 베이커의 영화들에서 자극적인 요소들은 그저 기초화장에 가깝다. 또한 션 베이커는 텍사스의 외진 마을에서 펼쳐지는 인간 군상들의 사랑 없는 전쟁을 달콤하게 그려낼 마음이 없는 데다 어떤 캐릭터도 관객들에게 호감을 살만한 인물로 만들지 않는다. 전작인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도 그랬듯 그는 매직 아워의 찬란한 노을보다는 그 노을을 만드는 먼지의 입자를 궁금해하는 감독이다.

알록달록한 도너츠 사이에 끼인 나체의 남자로 표현된 '레드 로켓'의 포스터처럼 이 영화는 캐릭터들의 발가벗은 욕망이 포박당하는 순간을 흥미진진하게 따라가는 영화다. 멈출 수 있다면 욕망이 아니기에 영화의 캐릭터들은 달콤한 함정에 다이빙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숨을 헐떡이는 자기애의 폭주, 스타일링을 받지 못한 나르시시즘 '레드 로켓'은 아름다움에 질식하고 멸시당한 이들을 향한 조롱조의 송가다. 영화의 첫 장면에는 LA에서 텍사스로 돌아가는 주인공 마이키의 모습이 보이그룹 Nsync의 히트곡 'Bye Bye Bye'와 함께 경쾌하게 보여진다. 지난 과거를 잊고 새 삶을 살려는 그의 의지 일지도 모른다 잠깐 생각했지만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진다. 과거가 마이키의 발목은 잡는다기 보다는 마이키가 과거의 환영을 꽉 끌어안고 놓아줄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아카데미에 버금간다는 올해의 포르노 배우상을 수차례 수상한 마이키는 스스로에 격렬하게 취해 있는 남자다.

이 정도로 비호감인 캐릭터를 만나는 것도 드문 일인데 사이먼 렉스의 능청스러운 연기 덕에 마이키는 외면하기는 또 어려운 캐릭터다. 물론 그뿐만이 아니다 천연덕스러운 욕망을 총 천연색으로 펼쳐내는 것은 모든 인물 또한 마찬가지다. 당황스럽게 솔직하고 어이없을 정도로 퇴행적이다. 이를테면 정상성에서 벗어난,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는 인물들 속에서 션 베이커는 욕망의 민낯을 또렷하게 직시한다. 기승전결과 해피엔딩에 익숙한 이들에게 그의 영화들은 어제 먹다 남은 아이스 바닐라 라떼의 이 맛도 저 맛도 아닌 불쾌한 단맛과 쓴맛 일 수 있겠지만 그 정직함에 소름이 돋는 영화들이기도 하다. 그토록 아름다운 노을을 만들어 내는 삶의 먼지들, 빛나는 착각 속에 질주하는 욕망들 그리고 사실은 누구보다 나를 사랑하는 이의 거대한 헛발질들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나의 일기장이 화면 가득 필사돼 있는 느낌이랄까.

나를 흥분시키고 나를 제일 잘 나가게 하는 일 그래서 한 치의 망설임도 잊은 채 뛰어들게 되는 순간. '레드 로켓'의 마지막 장면에 아연실색하면서도 그게 남 일 같이 느껴지지 않는 건 어쩌면 나 또한 버릴 수 없는 욕망들을 사실은 무척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콤한 모든 것이 올려진 뻥 뚫린 도넛을 베어 무는 일이 줄 수 있는 아찔한 쾌감은 이후의 후회를 덮는다는 걸, 어떤 순간에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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