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사월과 오월에는 자연의 온갖 생명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이기에 다른 계절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 또한 자연이 빚어내는 축복이고 우리가 마땅히 누리게 되는 혜택임에 틀림이 없다. 그 중에서 사월과 오월은 모든 생명들이 왕성한 삶을 펼치는 때이다. 그러므로 모든 생명들이 삶의 노래를 불러도 좋을 만큼 그 풍요로운 혜택을 마땅히 누려도 된다. 이양하의 '신록예찬'에서 다 말하지 못한 윤택함마저도 서로 나눌 수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역사를 이해하려는 자세는 매우 능동적이며 다양한 관점을 수용하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궁극적으로 가능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 현대사에서 제주의 '4·3'과 광주의 '5·18'을 명명하는 일들이 70년, 40년이 지나고 있지만 마뜩한 설득력으로 다가오는 해석들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근래에 어떤 의도인지 두 역사적 사건과 관련하여 정치적 슬로건으로 슬그머니 '화해'와 '상생'이란 말로 두 사건을 이끌어가려고 한다.
아픔과 상처를 극복하고 함께 공존하는 일이야 지상 최고의 가치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참으로 우울한 일은 그 함께의 주체가 누구냐이다. 아직도 현대사의 비극인 두 사건에서 죽음으로 내몰린 희생자들을 다 찾아내지 못하기도 했지만, 중요한 사실은 그 가해의 실체를 규명하는 일조차 뚜렷하지 않거나 꺼리는 상황에서 어떻게 '화해'가 되고 '상생'이 가능한 것일까. 문득, '상생'이란 말의 어원을 생각하며 '도덕경'의 '유무상생'처럼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동일한 것이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말이다. 눈앞에 사과가 있지만 동시에 없다는 주장은 누가 봐도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자의 ‘도덕경’에는 '있음과 없음은 함께 나왔다(有無相生)'는 말이 있는데, 불교의 기본 경전인 '반야심경'에도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고 했다. 결국 있음과 없음, 비움과 채움이 같다는 말이고 공존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상생은 이 공존에서 빌려온 말이 아니다.
지금 오월의 숲은 빈틈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온통 푸르다. 모든 생명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곧게 솟아오른 소나무와 이를 감아 오르며 곧 꽃을 피우게 될 담쟁이덩굴도 자연의 섭리이므로 서로 상생이며 조화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에서 제주의 ‘4·3’과 광주의 ‘5·18’은 가해의 실체가 명명되지 않고서는 ‘화해’와 ‘상생’을 말할 수는 없다. 피해자만을 두고 거룩한 '화해'와 '상생'의 이름으로 위무하려고 한다면 공존의 결핍이므로, 우리의 역사는 처음부터 굴곡으로 왜곡이 심화될 뿐이다. <좌정묵 시인·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