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36)소의 잔등을 두드려주는 직업

[황학주의 제주살이] (36)소의 잔등을 두드려주는 직업
  • 입력 : 2022. 05.31(화) 00:00
  • 김채현 수습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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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뒤편으로 김종삼 시인의 '묵화'처럼 하루가 저문다.

'물 먹는 소 목덜미에/할머니 손이 얹혀졌다./이 하루도/함께 지났다고,/서로 발잔등이 부었다고,/서로 적막하다고.'

대문 위로 아치를 이루며 뻗어 나간 포도덩굴을 매주다 이웃집 사람과 마주친다.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오토바이로 20분쯤 가야 하는 소 치는 목장에서 일하고 있다. 목장에서 여러 잔일을 맡아 하겠지만,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면 소의 잔등을 두드려주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고단한 저물녘, 소의 잔등에 따뜻한 손을 얹어주며 하루의 노동을 마치는 마음이란 소를 같은 목숨붙이로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아프리카 마사이 사람들은 소똥집에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그중 큰 방을 송아지들에게 준다. 때로 사람이 소와 함께 자기도 한다. 몽골의 차탄족 또한 아기가 이불에 싸여 새근새근 자고 있는 오르츠(게르의 원형) 내부에 순록의 새끼도 함께 재운다. 그들에겐 식구와 식구 아닌 것의 개념이 온 땅으로 확장된다. 고양이나 개를 집에 들여 내남없이 사는 사람들도 주변에 많고, 우리집에서도 두 마리의 길고양이를 기르고 있다.

어린 시절 눈보라 섞어 치는 어느 궂은 날, 아버지의 손수레에 실려 장터로 가는 돼지를 따라간 적이 있다. 손수레를 밀어 돼지를 장에 데려가는 아버지에게서 느낀 따뜻한 태도와 정성은 어쩌면 돼지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 같은 것이었으리라. 채찍을 든 몰이꾼의 방식을 버린 풍경이 주는 힘은 고즈넉하고, 뜻밖에도 그 속에 우리가 아직 인간적이었던 시절의 풍경이 진솔하게 녹아있음을 기억하게 해준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은 살아있는 존재로서의 서로를 연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동물을 집안에 들이는 사람들에게 어떤 소망이 담겨있는지 죄다 알 수는 없지만, 그들이 생명의 느낌과 시간을 특별한 여유로 즐기거나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생명이란 서로 움직이고 변화하며 어떤 기대와 기다림을 잃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에 동물 인형이 많은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아이들만이 동물 인형에게 말을 건다. 생명 있는 무엇에나 쉽게 동화되는 아이들의 능력은 어른이 되면서 둔화된다. 가장 광범한 형태의 애니미즘이 동물 인형과 어린아이들 사이에 존재한다는 것도 맞다. 동물 인형을 도닥이며 자장가를 불러주는 아이들의 세계야말로 우리가 순수를 입에 올릴 수 있는 근거 중 하나가 되어주는 것이리라. 어른들은 동물들과 아이들의 세계에 빚이 많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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