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6)성산읍 신양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6)성산읍 신양리
공존의 가치를 현실 속에 구현해낸 마을
  • 입력 : 2022. 07.08(금) 00:00
  • 최다훈 기자 orca@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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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이름 자체에서 진취적인 마인드가 느껴진다. 새로운 태양―신양(新陽). 제주의 동쪽 바닷가에서 해 뜨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 바다 수평선에서 떠오르는 해는 늘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모양이다. 새로운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공동체의 터전을 지키고 가꿔온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끊임없는 도전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마을의 역사는 오래지 않으나 괄목할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은 그러한 마을 분위기에서 비롯하였으리라.

128년 전, 고성리에서 정씨와 김씨 등 몇 명이 섭지코지가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여 어로작업 중심의 생활터전을 마련하면서 설촌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최초의 이주 이후 15년이 흐른 1909년의 기록에 의하면 50가구 정도가 살고 있었으니 짧은 시간 내에 마을의 면모를 갖춘 놀랍고 독특한 마을이다. 단기간에 인구가 유입되어 마을의 형태를 띠게 된 것은 반농반어가 가능한 환경적 요인이 가장 컸을 것이라고 마을 어르신들은 말씀하신다. 당시 마을 명칭은 '방뒤'라고 했다. 포구 이름이 방두포(房斗浦)였기에 거기에서 유래하였다는 것이다.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증조부 때부터 이룩해낸 4대 120여 년의 성과가 현재 신양리의 모습이고 보면 성장 속도로는 최고 최강의 경쟁력을 보여주는 마을이라고 해야겠다. 4세대라고 할 수 있는 30년 전부터 섭지코지와 신양해수욕장이라고 하는 관광자원을 기반으로 3차산업과 연계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여 슬기롭고 끈기 있게 현재의 모습을 이끌어냈다. 그 비결을 묻자 정광숙 이장은 망설임 없이 "공존"이라고 답했다.

신양리 속에서는 농어민도 상인도 재벌들도 모두 공존하고 있다는 마인드. 그 마음이 깨지지 않는 한 서로 상생협력하며 서로가 서로를 발전시키는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마을공동체가 어떤 페러다임을 가지고 진취적일 수 있는 가를 보여주는 소중한 사례라고 해야겠다. 새로운 태양―신양리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은 변화에 대한 수용, 흡수 방식에 있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농어민 중에 관광 관련 부업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백 명 안팎이고 관광서비스업이라고 할 수 있는 식당과 숙박 관련 업소가 리 단위 마을에 70곳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발 빠르게 관광을 매개로 도농복합지역으로 탈바꿈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겨내야 할 시련이 있었다. 신양해수욕장에 매해 밀려드는 파래와의 전쟁. 마을 주민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것은 살아온 경험에 입각한 것이었다. 바깥 방파제가 건설되기 전까지는 이러지 않았다는 것. 1994년부터 1999년에 걸쳐서 만들어진 바깥 방파제가 조류의 흐름에 결정적인 방해를 하여 파래 개체수의 폭발적인 증가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결론은 철거가 답이라는 주장, 신양해수욕장은 생존과 직결된 곳이 되었다. 이미 관광산업의 영향권으로 진입해버린 마을 생업구조로 볼 때, 해수욕장이 기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은 생존권의 박탈을 의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분명 과학적 토대 위에서 환경영향평가에 필요한 연구용역을 했을 것이다. 이런 결과를 예측하지 못할 정도의 부실용역이었다면 그 책임은 이 사업을 추진한 기관에 있다.

과학적 분석이 틀린 답을 가지고 바깥 방파제를 건설해 지금의 현상이 나타났다면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철거가 답이다. 관광마을을 미래 비전으로 가지고 있는 마을공동체 입장에서 이 문제 해결 없이 미래는 없다는 것이다. 바닷물의 흐름은 근본적으로 사람이 인위적으로 제어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요행을 바라는 것은 과학이 아니기 때문에 이미 현상적으로 결론이 난 이 문제를 다시 연구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다. 하루속히 주민들의 민원이 받아들여져서 바깥 방파제 철거라고 하는 행정적 실천이 있어야 한다.

기억한다, 90년대 초반까지의 신양해수욕장은 피서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다. 하루 속히 옛 명성이 회복 될 수 있도록 새로 출범한 도정이 마을주민 생존권 차원에서 해결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바깥 방파제 문제는 마을공동체 입장에서 분명 재앙이다. 원인을 제공한 곳에서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일. <시각예술가>

공존의 문을 열고
<수채화 79cm×35cm>

새벽부터 짙게 덮고 있던 해무가 오후 들면서 북쪽으로 밀려나 구름인 듯 멀리 자리 잡은 날. 서쪽으로 기운 해가 더욱 눈부시게 마을을 비춘다. 남쪽 해안 도로에서 포구들을 지나 주거 공간이 시작되는 곳으로 진입하는 곳이다. 백 년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설촌 초기에 개척하며 쌓은 돌담들이 바닷가로 향하고 있고, 새마을운동 시기에 초가집 지붕을 슬레이트로 바꾼 가옥형태와 숙박시설로 보이는 상대적으로 높은 건물들. 도로 바닥 맨 앞에 배치된 맨홀뚜껑은 정주여건이 도시 기능을 충족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신양리에서 나타나는 모든 현상이 공존의 형태로 다양성을 유지시킨다. 배치된 모든 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시각적 풍요를 심포니오케스트라의 악기들처럼 느끼며 우월한 하모니를 도출하려 하였다. 그리는 내내 떠나지 않은 주제의식은 공존의 문이 어떤 형태일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던 중에 떠오른 영감을 상상화 요소에서 가져와 풍경 속에 그려 넣고 말았다. 문이라고 하는 것은 열고 닫는 본질적 기능이 있어야 하는 것이로되 공존의 문은 그러한 것이 없어야 한다. 길이 곧 문이 되는 세상. 다양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표시된 영역 공간이면 충분하다. 바닥에 채색된 선들의 논리다. 신양리 마을공동체가 추구하는 이념을 풍경 속에 담아내는 작업을 통하여 미력한 환쟁이의 보람을 크게 느낀다. 삶이 숨 쉬는 소박한 길, 마을 안쪽을 향하고 있으니 이 공존의 문을 지나면 늘 밝은 미래가 열릴 것이다.

섭지코지에 오등애불턱
<수채화 79cm×35cm>

고무 잠수복이 없던 시절, 겨울바다에 태왁을 구덕에 지고 물질 나온 해녀들이 옷을 갈아입고 바다로 나가던 곳. 한쪽에 땔감이 조금 준비되어 있어서 물질을 하고 나온 해녀들이 싸늘하게 언 몸을 녹이려고 불을 피워 모여 앉아 서로를 위로하며 나누던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다. 북쪽으로 담을 쌓아 추운 바람을 막은 구조다. 놀랍게도 섭지코지에만 열여덟 개 넘는 불턱이 있다. 원형이 유지되고 있는 것도 있지만 형태를 잃은 것도 상당수. 불턱의 이름들 속에 제주인의 언어정체성이 짙게 배어있다. 빌레불턱, 성그랭이불턱, 조랑개불턱, 방애깨불턱, 구시개불턱, 작지불턱, 복당여불턱 등 섭지코지 해변을 따라 이렇게 많은 불턱이 존재했던 것은 해녀들이 생활의 터전으로 바다와 함께 동고동락했음을 의미한다. 선택의 여지가 없을 법한 삶 그 시간과 공간들이 문화로 자리 잡는다. 대부분 그렇게 살아가니 서러울 것도 없는 숙명과도 같은 당연함 속에 누적된 불굴의 의지를 해녀들의 대화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정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부끄러운 것은 세계가 인정하는 해녀문화 속 '불턱'이 지방문화재의 반열에도 오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봉수대나 연대, 비석과 같은 문헌 기록과 타지역의 사례와 견주어 지정하는 것이 지방문화재의 논리라면 문화의 본질인 정체성은 설 자리가 없는 곳이 된다. 신양리 섭지코지는 불턱문화의 보물창고다. 하루속히 발굴 복원해 문화재 지정이 돼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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