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42)쪽방 한 칸의 평지

[황학주의 제주살이] (42)쪽방 한 칸의 평지
  • 입력 : 2022. 07.12(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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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새벽 소나기를 퍼붓던 하늘이 조금 밝아옵니다. 막힌 데 없이 빗물은 흘러 내려가도 중얼중얼 내려가지 않는 꿈의 도랑에서, 산동네 골목 같은 데서, 첫 직장에 다니던 때가 있었지요. 자꾸 이어 붙여지는 판잣집 맨 위쪽 자꾸 누렇게 찌들어 겹치는 세월을 바라보며 맛있는 샘물 먹으러 오라는 기별을 벗에게 하던 언덕은 모두들 가난했지요. 거기서 환한 시가지를 내려다보던 때, 생각이 납니다. 마음의 분실물보관소가 있다면 돌멩이에 찢긴 신발을 끌며 그것이 몸인가, 몸이 아닌가 모를 지경의 경량(輕量)만을 가지고 사랑을 향해 나아가려 했던 비늘같이 반짝이는 것이 어디엔가 굴러떨어져 있을 것만 같습니다. 지금 그 시절이 떠오르는 건 내려다 보이는 제주 바다의 환한 어등(魚燈) 때문이지요.

주민들은 여기를 신안동으로 부르기도 하고, 와흘리 옆 마을이라 와흘리로 치는 사람도 있지만 공식 지명은 신촌리입니다. 하여간 지대가 높은 마을이라 드넓은 귤밭 밑으로 조천읍이 보이고 그 뒤로 펼쳐진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옛날옛날 이 동네 기슭에 몇 평 안 되는 평지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몇 집 건너에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태풍에 나무가 쓰러지며 담이 무너진 우리집 돌담을 쌓으러 온 분이지요. 얼마 전 마을에서 기별이 와 그분의 타계 소식을 전했습니다. 고작 쪽방 한 칸의 넓이인 이 어느 언저리 평지에서 조나 귀리를 심고 좁쌀죽을 먹었다는 이에겐 얼마 안 되는 조각보같은 비탈밭만이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땅이었습니다. 그때 그분이 바라보던 기슭 저 건너 제주 바다의 어등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가난을 개인적 문제로 치부할 때 사회적 의로움이 자리할 양지는 없어집니다

한때는 물 파주는 사람으로, 그리고 돌담 잘 쌓는 사람으로 살았지만, 극한의 자연조건 속에서 태어나 생존의 문제가 언제나 절대의 문제였던 노인의 만년(晩年)은 그런대로 평안했던 것 같습니다. 자녀들에게 귤밭도 나눠주고 갈 정도의 여유도 있었구요. 그런데 돌담을 쌓으며 자식들 이야기하다 했던 말이 떠오릅니다. 한 마디로 가난은 개인적인 능력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이었지요. 꼭 성실하지 않아서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인 거지요. 맞는 말씀입니다. 가난을 개인적 문제로 간단하게 치부할 때 사회적 의로움이 자리할 양지는 없어집니다. 많은 이들에게 가난한 음지의 시절이 있었고, 지금도 가난한 사람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새발자국 같은 작은 삶의 흔적 하나가 기슭에서 생밀 몇 알을 줍던 기억을 누군가는 아프게 기록했구요. 캄캄한 산동네에서 환한 시가지를 내려다 보던 가난한 꿈 하나가 나그네처럼 지나가기도 했습니다.

내게도 좀더, 좀더, 열심과 사랑이 필요합니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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