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주의 문화광장] 시각예술이 남긴 탄소발자국

[김연주의 문화광장] 시각예술이 남긴 탄소발자국
  • 입력 : 2022. 07.19(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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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올라퍼 앨리아슨의 작품 '얼음 시계'는 지구온난화를 주제로 한 예술작품을 소개하는 글에서 자주 언급된다. 그린란드의 빙하를 파리 팡테옹 광장(2015) 등에 옮겨 놓고 눈앞에서 빙하가 녹는 모습을 보게 한 이 작품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었고 지구온난화의 심각성을 깨닫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 빙하를 옮기면서 탄소발자국을 남겼고, 이는 작품의 주제와 모순되기에 앨리아슨이 보고서를 작성해 탄소 배출량을 밝히며 진정성을 보였음에도 미술계의 몇몇 사람들은 이 작품을 비판했다.

이 글에서는 '얼음 시계'를 옹호하지도 비판하지도 않을 것이다. 작품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실천으로 줄어든 탄소 배출량과 작품 운송 중에 발생한 탄소 배출량을 비교한 자료가 없으니 판단을 미룰 수밖에 없다. 다만 '얼음 시계'를 보며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물질에 기반을 두고 있는 대부분의 시각예술이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탄소중립을 실천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말하고 싶었다.

전시가 끝난 후 버려지는 가벽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나무가 베어지고 운송되고 가공되며, 작품 운송에는 배와 비행기도 이용된다. 최근 기후 위기, 환경파괴 등을 주제로 한 전시에서는 재활용할 수 없는 나무 가벽 대신 다른 방법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극히 일부 전시에 불과하고 작품 운송은 다른 방법이 없다. 작품이 이동하지 않는 경우라도 작품 제작을 위해 작가가 이동하기 때문에 탄소발자국은 남는다. 이 외에도 현수막 등 전시가 열릴 때마다 탄소발자국을 늘리는 요소는 많다. 특히 세계 곳곳에서 늘고 있는 큰 규모의 국제 전시일 경우 탄소발자국의 양 또한 엄청나다. 시각예술이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은 '순수'라는 편견에 가려진 시각예술의 어두운 측면이다.

시각예술에 있어 탄소중립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다 보니 온실가스를 줄이겠다고 괜한 노력을 하기보다 탄소중립을 포기하는 것이 현명해 보인다. 작품을 만들지 않거나 전시를 열지 않는 것 외에는 탄소중립에 다다를 방법이 없지 않은가?

엄밀히 말하면 동시대 미술을 기준으로 했을 때 탄소중립이 불가능해 보이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작품을 운송해 이곳저곳에서 전시하는 일은 근대 이후에 생겼다. 그전에는 자연에서 얻은 재료로 작품이 제작됐고, 벽화나 부조처럼 작품이 건축물의 일부라서 작품을 옮겨 다른 장소에서 전시할 수 없었다. 작가와 작품이 이동한다고 해도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운송 수단은 없었기에 문제가 되지 않았다. 즉 근대 이후 예술이 자연에 반하는 행보를 이어온 것이다. 예술은 이처럼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예술 개념과 전시 방법으로 바꿔나가면 탄소중립에 다다를 수 있다. 과거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새로운 예술 개념과 전시 방법이 제안돼야 한다. 제주도 미술계가 이러한 변화의 선봉에 서있길 기대해 본다. <김연주 문화공간 양 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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