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49)어느 젊은 화가에 관한 단상

[황학주의 제주살이] (49)어느 젊은 화가에 관한 단상
  • 입력 : 2022. 08.30(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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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달빛과 핸드폰 화면에서 발산되는 빛을 근거 삼아 밤을 파랗게" 그리는 화가를 만나러 갔다. 말하자면 다른 불빛이 없는 어스레한 새벽이나 밤의 파란 풍경 속에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생각에 빠진 인물만이 눈에 들어오는 그림이 있는 것이다. 고산지대의 마을이나 텅 빈 목장에서 한여름밤을 보낸 기억처럼 그것은 아련하고 아뜩한데.

나는 한때 놀고 싶어서 혼자 남은 아이처럼 세상을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었다. 전시장에서 만난 젊은 화가는 내가 젊어 상상하던 세계보다 더 몽환적인 이미지가 포함된, 형용할 수 없는 무언가를 그린다. 비행정을 타고 알 수 없는 데서 온 기별을 읽는 듯 나는 젊은 화가와 그렇게 한 시간을 보냈다. 그가 어디서 본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아니면 보고 싶은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그의 색감과 선은 전원(田園)이나 어느 호수 같은 데서 책을 읽거나 핸드폰을 보고 목욕하는 사람을 밤공기 속에 발자국처럼 찍어놓는다. 거기엔 파랗고 녹색을 띠거나 보랏빛 어룽짐이 있으며, 그런 아름다운 밤을 지어서 밤이라 부른 독자적이고 일방적이며 어딘가 좀 냉담한 스타일이 있다. 그리고 특이하다고 할 정도로 안에서 배어 나오는 알 수 없는 파란 빛은 삶과 죽음의 모호한 얽힘을 지시하는 듯하다.

젊은 화가는 낮에 일 다니고 밤 늦게 귀가해 새벽까지 그림을 그렸다. 얼핏 생경해 보이는 '유재연'만의 파란빛 밤은 그렇게 화가의 실생활과 체험을 통해 자연스레 화폭에 스며든 것이며, 그 빛은 밤의 지붕 위에서 굴러 내려오는 눈덩이처럼 주변 사물을 지우며 자기 자리를 두루마리처럼 깔았기에 인공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일 테다. 우리는 그 꿈과 환(幻) 사이를 가로질러 가거나 그 둥긂 위로 자유로이 올라가 앉을 수 있다.

그림 속에서 파란빛 앞치마를 두르고 웨이터처럼 새벽빛은 한쪽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그 사이로 저 앞에서 혹은 뒤에서 밤이 천천히 겉저고리를 벗는 소리가 나고 물밑에서 표면으로 떠오르는 움직임은 나의 것이라고도 나의 것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다. 사람의 발자국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디인지 알고 있는 사람처럼 어떤 방문객도 기다리지 않으나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있는 시간이 그에겐 있다.

끝없이 계속될 것만 같은 밤과 새벽은 어두운 물과 희미한 밤이 섞일 때만 들여다볼 수 있는 색깔을 낳고 그리고, 자연 속에서 서로 위무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알 수 없는 사물과 존재의 특유한 몸짓과 소리는 뭔가를 속삭이며 죽어가는 스승의 선물 같은 감동이 있다. 아울러 그의 그림에서 정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 빛과 소리는 눈앞에 있는 것은 아니고 우리의 마음과 상상력 속에 있을 것이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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