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우리 사이엔 끓어야 할 마음들이 있다

[영화觀] 우리 사이엔 끓어야 할 마음들이 있다
  • 입력 : 2022. 10.28(금)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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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수프와 이데올로기'.

[한라일보] 내가 몸이 아플 때 할머니는 항상 가스레인지 위에 주전자를 올리셨다. 끓어 오른 물에 꿀을 한 숟가락 넣은 다음 천천히 저어서 내밀며 '속이 아플 때는 뜨거운 걸 식혀가면서 먹으면 금세 괜찮아져'라고 얘기하셨다. 플라세보 효과였을지도 모르지만 나를 쳐다보는 할머니를 바라보며 더디게 식어가는 꿀물을 조금씩 입 안으로 흘려 넣으며 나는 괜찮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자신이 요리를 잘하지도 못하고 어떤 약을 사다 줘야 할지도 모른다고 자책하곤 하셨지만 나는 그 뜨겁다가 미지근해지는 꿀물 덕에 여러 차례 좋아졌다. 그리고 아직도 그 온도를 기억한다. 펄펄 끓던 것이 조금씩 따뜻해지던 안심과 진심의 온도를.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단어가 공존하며 만들어낸 수많은 겹겹의 시간들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영화다. 극영화 '가족의 나라', 다큐멘터리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을 통해 결코 평범하지 않은 자신의 가족사를 스크린으로 옮겨온 재일교포 2세 양영희 감독은 '수프와 이데올로기'를 통해 한국사의 거칠고 모진 순간들을 통과해 온 어머니 강정희 씨의 삶을 뭉근하게 끓여낸다.

조선인이지만 일본에서 태어난 강정희 씨는 제주로 이주한 후 4·3 사건을 겪게 되는, 한국사의 고통스러운 한복판에 위치했던 인물이다. 10대 후반, 평화롭던 섬이 피로 물들던 끔찍한 제주에서 탈출해 동생들과 함께 일본으로 돌아와 결혼 후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아 키웠던 그는 세 아들을 북으로 보낸 뒤 여든이 넘도록 일본에서 살아왔다. 그의 삶은 단순히 드라마틱하다고 표현하기에 부족한 순간들로 이어져있다. 일본과 한국, 북한이라는 시공간의 어디에도 속하고 또 속하지 않는 강정희 씨의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운 인생이 그의 딸 양영희 감독의 세심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담긴 영화가 '수프와 이데올로기'다.

역사 속에서 데일 듯 뜨거운 이념의 충돌은 언제나 수많은 개인들의 삶을 고통스럽게 몰아세워 왔다. 낭떠러지 끝으로 밀려난 이들의 역사는 충실하게 기록되지도 않았고 충분하게 보상받지도 못했다. 우리는 때로는 고통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이 망각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고, 시간이 약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영겁의 시간이 지난다고 해도 잊히지 않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은 잊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잊어선 안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오래된 기억을 딸 영희와 사위가 될 일본인 카오루에게 마치 오래 끓인 수프처럼 천천히, 조심스레 꺼내놓는 강정희 씨의 일상과 고백을 담은 전반부와 기억을 잃어가는 강정희 씨가 다시 마주한 과거의 조각들을 그의 딸 양영희 감독과 그의 사위 카오루가 함께 맞춰가는 후반부를 통해 관객들의 마음에 커다란 파문을 남기는 작품이다.

강정희 씨가 살아온 세월, 양영희 감독이 기록한 시간, 그들의 가족이 된 카오루가 함께한 순간들이 만들어 낸 이 가족의 역사는 이들을 둘러싼 거대한 역사보다 조금도 작지 않다. 일본인 사위를 반대하던 강정희 씨가 카오루에게 끓여 대접한 수프의 온도와 평범하지 않았던 유년기와 이해하기 어려웠던 엄마의 삶을 온 마음으로 끌어안는 양영희 감독의 카메라, 그리고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타국의 한 사람을 가장 소중한 가족으로 귀하게 간직한 카오루의 시선이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우리 사이엔 끓어야 할 마음들이 있다.

<진명현 독립영화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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