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23)성산읍 난산리

[양기훈의 제주마을 백리백경.. 가름 따라, 풍광 따라] (23)성산읍 난산리
농로의 아름다운 가치를 발견하게 되는 마을
  • 입력 : 2022. 11.11(금)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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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옛 명칭은 난믜, 난미로 불렀다고 한다. 산을 뜻하는 뫼를 '믜'나 '미'로 발음해온 제주인들, 그래서 난산(蘭山)이다. 참으로 고결한 느낌을 주는 두 존재의 만남. 난초와 산. 사군자 중 하나인 난초의 품격과 우직하게 솟아 모두를 포용하는 산이 상징하는 포부와 기상이 마을 명칭에서 풍겨난다.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는 이 지역에 난초가 많았었다고 한다. 난초가 추구하는 유교적 품성을 닮아서일까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선비마을이다. 지금도 한집 건너 교육계에 진출한 사람들이 있다고 하니 마을의 전통적 가치관은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후손들에 의해서 조상들의 정신이 파악되고도 남는다. 주변 마을 사람들의 인식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공통적인 견해는 '온순한 성품을 가진 양반 유림촌'이다.

언덕 이름들이 정겨운 마을이다. 제주어의 숨결이 느껴지는 지명들이라 더욱 친근감이 든다. 꽝무더니, 바슬동산, 면의마루, 국제모루, 동산가름 등 그 언덕과 밭들 사이로 슬기롭게 길을 내며 살아온 마을이다. 모구리오름과 나시리오름, 유건에오름이 그 기운을 뻗어내리고 있다. 그 정기가 용융돼 땅의 힘을 형성하는 곳. 시계방향으로 수산리, 온평리, 신산리, 삼달리, 성읍리에 둘러싸여 있다.

1975년 도로포장용 골재를 채취하다가 면의마루 옆에서 마제돌도끼 2점과 돌끌 1점이 발견됐다.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다. 자연 상태에서 생존에 필요한 많은 요소가 풍부했기에 저 석기를 사용하던 사람들이 생활터전으로 삼았을 것이다. 목축산업이 왕성하던 100여 년 전까지는 소낭가름 지역에서 살다가 차츰 제미터, 굴집터 부근으로 이주했고 결국 지금의 위치에 자리잡게 됐다고 한다. 성산읍에서 가장 비옥한 토양을 가졌다는 마을. 화학비료를 쓰기 전까지는 많은 부분 토질에 의존하는 농경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을의 번성은 농산물의 소출량과 비례했을 것이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도 4·3광풍이 몰아쳤다. 100명이 넘는 청년들이 희생됐다고 한다. 그 죽음은 마을공동체의 입장에서 엄청난 위기가 됐다. 오랜 역사를 가진 마을에 활력이 떨어지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는 어르신들의 회고담. 유능한 인재들을 잃은 슬픔이 엄청난 극복의지로 폭발했던 것일까? 지독한 교육열로 마을공동체의 위상을 복원하겠다는 묵시적 기류가 마을사람들을 지배하게 됐다고 한다. 그 결과가 교육계, 학계, 언론계에 진출한 인물들이 엄청나게 배출되게 된 것이다.

김형주 난산이장에게 가장 큰 마을의 자긍심을 여쭸더니 "예절!" 이라는 두 글자로 답했다. 선비마을 양반촌다운 담백함. 웃어른을 공경하고 후배들을 돌보는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삶의 방식은 말처럼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 예절. 전통적 질서에 대한 강력한 신뢰가 난산리의 밝은 미래를 열어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서로를 위하는 마음. 제주의 마을마다 깊게 뿌리 내린 그 정신문화에 대한 깊은 신뢰와 행동이 느껴졌다.

풍광과 관련해 어떤 특별하게 튀는 곳이 없다. 그냥 평범한 농촌마을로 보인다. 그러나, 난산리의 최고 경쟁력은 아직도 원형을 잃지 않고 그대로 보존된 밭과 밭 사이 농로다. 경승지 감각에서 탈피해 힐링을 추구하는 탐방객들에게 정감어린 길들을 아름답게 제공하는 것. 난산리는 소박함으로 승부할 수 있는 최적의 마을이다.

농업은 근본산업이라고 하는 생업의 공간-밭을 보유하고 있다. 밭들과 밭들 사이를 다니며 농사일을 하는 삶과 그 공간적 배치들은 오랜 기간 합리적인 선택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등짐과 마소에 의해 운반을 해야 하던 시기에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생성된 농로. 그 생존의 흔적들을 난산리는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답다. 소박한 그 심성이 밭과 밭 사이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번잡한 도시의 길에서 느끼지 못하는 그런 길을 걸어간다는 것. 밭은 농업의 터전이기도 하지만 경관적 가치 또한 크다. 누군가 소중한 것을 키워서 삶을 영위하는 공간, 밭이 풍기는 메시지는 자연 그 이상의 아름다운 자원이다. <시각예술가>



비석 그림자가 있는 풍경
<수채화 79㎝×35㎝>




마을회관에서 동쪽으로 조금 내려가다 보건진료소 앞에서 멈춰 섰다. 오른쪽을 바라보니 낮은 오르막, 입동이 지난 초겨울 강렬한 햇살을 받은 모든 물상들이 그림으로 치환돼 들어왔다. 그 중에서 가슴 저미게 파고들어오는 것은 그 분들의 그림자였다. 비석이라는 돌의 의미보다 길바닥에 해시계처럼 자리 잡은 그림자. 마을엔 비석들이 많다. 유교적 선비정신이 깊이 뿌리 내린 마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살아가는 동안에 어떻게 살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았던 조상들의 정신이 마을공동체라고 하는 테두리 속에서 이토록 아름답게 빛나는 것을. 비석 하나하나에 그 시대를 살았던 분들의 소중한 마음과 뜻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여기서는 그 존재감이 햇살과 만나 후손들에게 그림자로 연결되고 있다. 내리막 경사에서 다시 오른쪽 오르막이 있는 야릇한 변화 속에 빛과 그림자는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느라 분주하다. 왼쪽에 배치된 삶의 공간 집과 오른쪽의 살았던 기록 비석들이 길을 사이에 두고 끊임없이 뭔가 시간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다. 조금 멀리 나무들은 자신의 나이테에 그 대화를 쉬지 않고 기록하고 있으며. 마을의 분위기를 그림으로 설명하는 보람이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그리는 내내 할 수 있었다. 청홍대비의 지붕이 아무리 강력한 존재감을 뽐낸들 짙은 회색 위에 다섯 개의 비석 무개를 이기지 못한다. 길이라고 하는 양팔저울의 눈금이 그렇게 판단하고 있으니 말이다. 난산리의 마음을 그리려했다.





학교운동장에서
<수채화 79㎝×35㎝>




연필선 느낌이 나는 담채화를 통해 필통소리 들리던 그 시절 모습을 연상하고 싶었다. 46년을 이어오던 난산초등학교가 1995년 문을 닫았다. 그 후로도 지금까지 운동장은 어느 날 문득 찾아올 졸업생들을 위하여 그대로 살아 있다. 배움은 망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풍경으로 그리고 싶은 존재들이 얼마나 많으랴마는 유독 이 운동장의 한 부분을 그리려 한 것은 마을공동체의 뚜렷한 자부심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마을. 텅 빈 운동장을 그린다손 무엇을 찾겠냐고 반복하고 반복하며 그렸다. 이 풍경화가 완성돼갈 무렵, 문득 상상화를 그리고 싶어졌다. 이 그림은 배경이고 중심에 전통한옥을 크게 그려서 편액에는 '예절서당'이라고 쓰면 좋겠다. 마을 어르신 중에 유가의 기본 소양을 교육하실 수 있는 분들이 많다고 하니, 방학이나 휴일에 천자문과 예절을 교육하는 그런 서당으로 새롭게 태어났으면 하는 환쟁이의 소박한 마음. 현실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체험학습의 공간으로 만들어져서 전통적인 양반고을에 찾아오는 학생들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다면 마을공동체 입장에서는 큰 보람이 아니겠는가. 세월이 지나, 그런 모습으로 탈바꿈 된 이 운동장에 와서 다시 화판을 펼치고 기와집과 저 햇살 반사된 나무들을 함께 그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교육적 가치와 같은 엄청난 담론을 내가 거론할 바 아니나 이 공간이 지닌 소중함을 발전시켜야 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을 향해 건의하는 마음으로 한 장의 담채화를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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