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학주의 제주살이] (60)서귀포극장 계단에 앉아

[황학주의 제주살이] (60)서귀포극장 계단에 앉아
  • 입력 : 2022. 11.15(화) 00:00
  • 김채현 기자 hakch@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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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일보] 초기에는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 폐업할 무렵 조조 상영 시간이 10시였고 마지막 상영 시간이 20시였다고 쓰인 알림판이 남아 있는 서귀포극장의 오후 4시입니다. 이 시간이라면 당시 4회차 상영 시간에 해당됩니다. 물론 지금은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극장이지만 영화 외에 거의 모든 문화예술이 행해질 수 있는 노천극장입니다. 음악인들이 가장 서고 싶은 무대라는 말이 빈발이 아닐 정도로 극장은 오래된 아름다움으로 가을에 가장 예뻐집니다. 불로 건물 일부가 소실되고 태풍에 지붕이 날아간 뒤의 흉한 상처의 흔적이 긴 세월을 거치며 그대로 고풍스럽고 정겨운 모습과 용도로 변화되었지요.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보고, 그중에는 못 보고 지나쳐야 할 풍경들을 보고 삽니다. 오늘처럼 서귀포극장 계단에 나그네가 앉았다 가는 것은 추억을 새기기 위해서지만 추억을 지우기 위해서일 수도 있지요. 가끔 공연을 보러오거나 시인들과 시낭송 회원들의 모임에 초대되어 오지만, 여기서 내 마음은 자주 옛날을 향합니다. 기록을 찾아보니 상영 리스트에 오마 샤리프와 까트린느 드뇌브 주연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비우'가 들어 있습니다. '쉘부르의 우산'으로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까뜨린느 드뇌브는 올해 81세가 되었지만, 우리 시대 청춘들에게 가장 설렘을 준 여인 중 한 명이었지요. 황태자지만 황제와 정치적 입장이 달라 결국 쫓기는 신세가 된 루돌프와 그의 연인이 짧은 생을 스스로 마감했던 운명의 시간, 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볼 때 달빛 아래 노루 한 마리가 눈밭을 걸어가고 있었지요. 사랑엔 어느 정도의 환상이 포함되는 거니까 슬픔마저 부드럽고 때론 요점마저 없지만 훌륭한 언어가 생을 살아갑니다. 영화 속에서 까뜨린느 드뇌브가 연인이자 황태자역인 오마 샤리프에게 말하지요. "두 번 신(GOD)이 되고 싶어요. 한 번은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원없이 사랑하는 일을 위해서, 또 한 번은 그 사람이 어떤 제약도 없이 자신을 사랑해 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어두워지기 전에 극장을 나가야겠습니다. 옛날 이 극장 앞에는 설탕 뽑기 아저씨가 있었고, 구두닦이, 쥐포 굽는 할아버지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을 떠올리는 무대 앞과 좌우 내벽에 담쟁이 덩쿨이 예쁜 단풍으로 불붙어 거대한 캔버스가 되고, 마치 물이 막 끓기 시작할 때의 잔 움직임 같은 극장 대기가 나를 감쌉니다. 벽에 난 미세한 구멍과의 접촉으로 바람이 무슨 소린가 내고 빗물이 살짝 고인 물바닥에 하늘의 작은 귀퉁이가 담깁니다. 말라비틀어져 밑동만 남은 아무 쓸모 없는 비자나무 같은 사람도 당신의 눈엔 신비롭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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