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 제주대첩 망각에서 기억으로] (4)제주사회에 남긴 것들 ②

[을묘왜변 제주대첩 망각에서 기억으로] (4)제주사회에 남긴 것들 ②
그때 제주성이 무너졌다면… 평화를 지킨 희생들
  • 입력 : 2023. 06.13(화) 00:00  수정 : 2023. 06. 13(화) 15:18
  • 진선희 기자 sunny@ihall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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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종실록 '영암의 수성과 제주의 파적' 기록한 의미 새겨야
해상 요충지로 동북아 속 제주의 지정학적 위상 일깨운 사건
"남해안 도서 핵심 제주의 대첩이 본토 넘어 국토 굳게 지켜"

[한라일보] 2017년 11월 제주에서 열렸던 제주학 국제학술대회의 주제는 '세계 섬, 해양문화와 미래비전'이었다. 당시 '섬에 대한 전망들-섬의 이슈들과 섬 연구'로 기조 강연한 스티븐 A. 로일 영국 퀸즈대학교 섬연구학 명예교수는 섬의 특성을 살필 수 있는 몇 개의 키워드 중 하나로 '고립'을 제시하며 "때로는 전략적인 차원의 고립이 섬에 가치를 부여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는 2차 대전 당시 전략 비행장이었고, 현재까지도 포클랜드 제도로 가는 항공기의 중간 기착지이자 미사일·위성 관측소로도 운영되는 어센션 섬을 예로 들며 "이 쓰임새는 모두 대서양 중앙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라는 특성에 기인한다"고 했다.

이 같은 발언은 해군기지 조성을 둘러싸고 크나큰 갈등을 겪어온 제주에 시사하는 점이 있다.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약 500년 전 벌어진 을묘왜변 제주대첩도 이 섬의 지정학적 위치를 다시금 일깨운 역사적 사건이었다.

왜구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 설치한 화북진지(화북진성). 을묘왜변 제주대첩 당시 왜구들은 화북포로 침범해 제주성으로 향했다. 이상국기자

▶"왜국과 단지 물 하나 사이에… 단단히 대비를"=을묘왜변 제주대첩으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때였다. 조선 중기 시인이었던 임제는 '남명소승(南溟小乘)'에서 섬 전역에 흩어진 방어시설을 조목조목 언급했다. '남명소승'은 1577년 과거에 급제한 임제가 그해 11월 제주목사로 있던 부친(임진)을 만나러 고향인 나주를 출발해 제주에 도착한 뒤 다음 해 2월 별도포에서 제주를 떠나기까지의 여정을 풀어놓은 기행문이다.

"제주 한 진(鎭)은 북쪽 바닷가에 있어서 두무악과 마주 대하고 있다. 정의현은 왼쪽 날개의 남쪽에 있고 대정현은 오른쪽 날개의 남쪽에 있다. 그리하여 이 3개의 진이 세발솥을 이룬 형세로 각각 북동서의 세 모퉁이에 위치하고 있다. 조천관·별방·수산의 3개 방호소가 동북방 모서리에 벌려 있고 애월·명월·차귀의 3개 방호소는 서북방 모서리에 벌려 있다. 남쪽으로는 서귀·동해의 2개 방호소가 있을 뿐이다. 제주도는 중국 대륙과 일본 열도의 사이에 있어 왜구들이 중국으로 가려면 반드시 제주도와 추자도 사이의 바다를 통과해야만 한다."('역주 제주 고기문집(古記文集))', 제주문화원, 2007) 앞선 노정에서 별방·수산 방호소에 들렀던 임제는 그 과정에 호위를 받으며 "이곳은 왜국과 단지 물 하나를 사이에" 둔 곳이어서 단단히 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을 듣는다.

진성만이 아니라 제주도 지정문화재인 환해장성, 연대 등은 치열했던 전투의 산물이다. 우리 곁에 희미하게 남아 있거나 복원이 이뤄진 그것들은 언젠가 전쟁이 끝나고 평화의 순간이 오리라 믿었던 섬 사람들의 염원이 머물렀던 곳이다.

제주대첩은 이전의 실패를 딛고 일어선 결과였다. 명종실록 1552년(명종 7) 5월 30일 기사를 보면 적왜(賊倭)의 배 1척이 정의현 천미포에 정박해 이틀 동안 버티며 포구에 사는 제주사람들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는 장면이 등장한다. 섬에 상륙해 접전한 적이 70여 명이었고 선상에 늘어서 있는 사람도 100여 명이었는데 제주 지휘관들이 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이 일로 제주목사 김충렬이 파직되고 남치근이 후임으로 온다. 제주목사 남치근은 전임자와 달랐다. 2년 뒤인 1554년 5월 25일 명종실록 기사는 남치근 제주목사가 천미포에 상륙한 왜적을 물리친 내용을 담았다.

제주도 기념물로 지정된 천미연대. 을묘왜변 제주대첩이 벌어지기 전 지금의 서귀포시 성산읍 신천리 천미포에서 제주사람들이 왜구에 희생당했다. 이상국기자

▶제주대첩 통해 세계평화의 섬 의미 다시 돌아볼 때=제주는 이미 여러 차례 큰 변을 겪어 백성이나 군사가 극도로 쇠잔해진 상태였다. 이로 인해 제주대첩의 주역 중 한 명인 김수문 제주목사에게 "각별히 군민(軍民)을 돌보고, 방비하는 모든 일도 마음을 다해 조치하라"(명종실록 1555년 1월 12일 기사)는 전교가 내려진다. 임금의 각별한 명령을 따르며 제주 섬에서 왜적의 침입에 대비했더라도 1555년(명종 10) 을묘년의 상황은 예상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과거와 달리 왜선 수십 척에 1000여 명의 왜구가 들이닥친 대규모 침략이었기 때문이다.

김석익의 '탐라기년'은 당시 왜적이 화북포로 침범해 3일 동안 제주성을 포위했다고 적었다. 그러자 "김수문 등이 힘써 물리치며 그들이 물러나기를 기다리다 날쌘 군사를 거느리고 추격하여 크게 쳐부수니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아주 많았다."('역주 탐라기년', 제주문화원, 2015) 명종실록에 드러난 김수문의 장계를 보면 1000명이 넘는 왜적에 맞선 군민(날랜 군사)들은 겨우 70명에 불과하다.

적은 숫자로 많은 수를 공격해 승리를 거머쥔 제주대첩은 당시 '영암의 수성(守城)과 제주의 파적(破賊)'(명종실록 1555년 7월 7일 기사)으로 표현됐다. 전남 영암에서는 성을 지켜 왜적을 물리쳤고 제주에선 적과 마주해 그들을 무찔렀다는 의미다.

정현창은 지난해 9월 제주도·제주연구원의 '을묘왜변과 지역사회의 대응, 역사문화자원화' 학술세미나 중 '왜구의 침입로로 본 을묘왜변' 발표문에서 "영암성 승리로 본토를 지켰고, 남해안 도서의 핵심 제주에서 대첩을 거두어 국토를 굳게 지켰다"고 했다. "을묘왜변이야말로 왜구들의 수백 년에 걸쳐 조·중 침략으로 쌓은 경험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일본이 품고 있던 몽상을 실현하는 장이었다"는 정현창은 "두 사람의 상반된 보고로 인하여 국가 존망에 위기를 초래한 임진왜란과 정보 보고를 정확히 믿고 판단해 대처한 제주대첩이 크게 대조를 보인다"고 분석했다.

만일 그때 제주성이 적의 공격에 무너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제주 사람들의 피해가 막대했으리란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단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왜구가 해상 요충지인 제주를 손에 넣었다면 동아시아 정세는 급변했을지 모른다. 이는 오늘날 한·중·일 동아시아 3국 간 평화를 말할 때 제주대첩을 기억해야 하는 이유가 아닐까. 1990년대부터 동북아와 제주도의 지정학적 위상 등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펼쳐졌고 2000년 제주특별법에 '세계평화의 섬' 지정 조항이 신설된 제주에서 제주대첩의 위상을 새롭게 세우려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이 기사는 제주연구원·제주도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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