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여름에 우리가 본 것

[영화觀] 여름에 우리가 본 것
  • 입력 : 2023. 06.16(금) 00:00  수정 : 2023. 06. 16(금) 17:10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영화 '그 여름'.

[한라일보] 다시 한 철의 여름이 시작되었다. 어떤 여름은 유난히 짧고 또 어떤 여름은 믿기 힘들만큼 길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랑은 순식간에 지나간 듯 느껴지고 어떤 사랑은 한참이 지났는데도 미열처럼 여전히 남아있다. 눈이 부시게 마주하고 조금씩 끓어오르고 쨍쨍하게 내리쬐다 더운 바람이 식어 가듯이 여전히 저물고 있는, 모두와 각각의 '첫사랑'. 세상에 존재하는 3음절의 단어 중 가장 해독하기 어렵고 도무지 객관적일 수 없는 판도라의 상자. 영화 [그 여름]은 그 첫사랑의 이야기다.

[쇼코의 미소], [밝은 밤]등을 통해 한국 문학을 사랑하는 독자들로부터 큰 지지를 얻고 있는 소설가 최은영의 단편집 [내게 무해한 사람]에 수록된 소설 [그 여름]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한지원 감독의 애니메이션 [그 여름]은 단편 소설의 정서와 향취를 서정적이고 섬세한 작화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장편 데뷔작 [생각보다 맑은]을 비롯 단편 애니메이션과 광고를 통해 독자적인 개성을 선보이고 있는 한지원 감독의 맵시가 잘 살아있는 오랜만에 극장의 스크린을 통해 만나는 한국 장편 애니메이션기도하다. 열여덟 살의 뜨거운 여름날 학교 운동장에서 우연한 사고로 마주하게 된 이경과 수이. 두 사람이 지나온 함께와 각각의 계절들을 담고 있는 이 작품은 61분이라는 러닝 타임 동안 수없이 달리고 멈추는 두 연인의 마음을 세밀하게 쫓으며 관객들의 마음길 위에도 쉽게 지워지지 않을 발자국을 남긴다.

축구 선수인 수이가 찬 공에 맞아 안경이 망가진 이경은 처음엔 흐린 눈으로 수이를 보고 그 형체를 또렷하게 감각하는 순간부터는 수이 앞에 선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게 된다. 나는 누구인지, 나를 보고 있는 당신은 내게 어떤 사람인지를 궁금해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이경의 여름이 시작된다. 수이 또한 마찬가지다. 사과를 하기 위해 이경에게 매일 딸기 우유를 전하던 수이는 하교길 다리 위에서 마주친 이경에게 같이 점심을 먹자고 청한다. 누군가에게 함께를 청하는 일. 수이의 마음이 골대가 아닌 곳을 향해서도 달리기 시작한 계절 또한 그 여름이다. 여름은 무언가가 늘 익어가는 계절이다. 과일이, 곡식이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달궈지면서 향기를 얻는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과 세차게 내리는 여름 비를 맞고 그 향기는 더욱 짙어진다. 이경과 수이의 사랑 또한 마찬가지다. 열여덟의 여름,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들은 쉽고 또 어렵게 무르익는 서로의 향기를 맡으며 쏟아져 내리는 계절을 이겨낸다. 다른 꿈을 꾸지만 같은 곳에 머무르고 싶은 둘은 새로운 세상을 찾아 나선다. 그렇게 사랑이라는 이름의 용기는 둘을 함께 있게 만들지만 때론 사랑이라는 이름의 욕망은 둘을 온전한 혼자로 만들기도 한다.

최은영 작가의 소설 [그 여름]과 영화 [그 여름]은 이야기의 처음과 마지막을 동일한 문장들로 시작하고 닫는다. '누군가를 만났다'로 시작하지만 끝은 '누군가와 헤어졌다'는 아니다. 영화의 마지막 문장은 스크린에 글씨로 적힌 '나는 그 새의 이름을 알았다'이다. 이경의 시점으로 그려진 영화 [그 여름]은 미열 같고 오한 같던 그 여름의 첫사랑이 남긴 것을 그 한 문장 안에 고스란히 담는다. 이경이 수이와 강가에서 봤던 새의 이름. 그 새의 이름을 수이에게 물었던 기억. 물 한가운데 서 있던 새를 마주보던 우리의 모든 순간들이 날아가는 새를 목격한 지금에 불현듯 소환되며 마치 무지개처럼 떠오르듯 펼쳐진다. 그 여름 우리가 함께 본 것이 그저 한 철의 목격이 아니었음을, 그 순간은 평생 마음 어딘가에 담아 두게 될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대답임을 깨닫게 하는 호명. [그 여름]은 기쁘고 아팠던 첫사랑이 남긴 것을 소중히 감싼 뒤 천천히 풀어 헤치는 영화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939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