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觀] 확신의 끄덕임

[영화觀] 확신의 끄덕임
  • 입력 : 2023. 07.14(금) 00:00  수정 : 2023. 07. 16(일) 13:24
  • 오소범 기자 sobom@ihalla.com
  • 글자크기
  • 글자크기

배우 임지연.

[한라일보] 2023년 가장 돋보이는 활약을 펼치고 있는 배우를 꼽자면 단연 임지연의 이름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전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더 글로리'의 박연진 역할을 통해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악역을 연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의 폭발적인 환호를 이끌어낸 배우 임지연. 최근 종영한 드라마 '마당이 있는 집'으로 그 화제성을 이어가며 또 한 번 '역시 임지연'이라는 찬사가 끊이지 않게 만들고 있다. 이 기세는 마치 지난해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와 영화 '범죄도시 2'를 통해 2022년 최고의 배우로 손꼽힌 손석구에 비견할만한데 개성과 매력을 갖춘 두 배우 모두 '한 방'을 위해 긴 시간을 버텨 왔다는 점도 비슷하다. '배우의 재발견'이라고 불리는 이 현상에 대해 혹자는 배우가 작품을 잘 만나는 운에 무게를 둘 것이고 배우에 대한 환호는 유행가와 같다는 자조 섞인 게으름의 반응 또한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작품과 더 많은 배우들이 모두 운과 유행에 좌지우지된다면 누가 확신을 갖고 연기자라는 직업을 지속할 수 있을까. 배우들은 누군가 공을 들여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나무 같은 존재들이다. 수피부터 우듬지까지, 새순부터 낙엽까지 배우가 기다리고 맺어낸 시간들이 운과 유행이란 말로 평가절하당하는 일은 자주 부당하게 느껴진다.

 '더 글로리'의 박연진은 확신과 불안으로 빚어진 도자기 같은 인물이다. 학교 폭력의 뻔뻔한 가해자이자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부족할 것 없이 살고 있는 그녀는 조소와 악다구니로 상대를 대한다. 거슬리는 모든 것들을 치워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그녀는 불만 붙여도 타 버릴 것 같은 악의 기름칠로 범벅이 된 사람이기도 하다. 당연히 박연진을 긍정할 수는 없다. 한 줌의 동정도 받기 힘든 이 절대악은 신기하게도 배우 임지연의 입체적인 조형을 통해 다양한 각도에서 광채를 내뿜는 인물로 변했다. 물론 여전히 치가 떨리는 인물이긴 하지만 이 인물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보는 이들이 이 인물을 마음껏 욕망하고 미워하고 저주하게 만드는 임지연의 연기는 이 처절한 복수극에 무시무시한 동력으로 작용했다. '마당이 있는 집'의 추상은은 박연진과는 정반대의 입장에 놓인 인물이다. 악취가 날 정도로 지독한 가정 폭력의 피해자인 그녀는 부유하지도 않고 한 줌의 권력도 지니지 못했다. 하지만 흥미로운 건 '더 글로리'의 박연진처럼 추상은 또한 생에 대한 의지가 무서울 정도로 강렬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처절할 정도로 벼랑 끝에 내몰린 상황에서도 추상은은 입에 음식을 욱여넣는다. 방영 후 크게 화제가 되었던 추상은의 먹방씬은 배우 임지연의 결기로 가득 찬 장면들이었다. 짜장면과 탕수육, 국밥과 사과, 딸기 아이스크림 등 그 음식들을 사람의 입에 들어가는 과정의 의성어 그대로 취식할 때 임지연의 모든 얼굴 근육이 꿈틀거렸다. 수세에 몰린 삶의 낭떠러지 앞에서도 자신을 먹여 살리는 인물, 그 감탄은 배우가 그저 잘 먹는 것에 대한 감탄이라기보다는 캐릭터를 잘 먹이는 이 배우의 힘에 대한 감탄이 아니었을까.

 데뷔 초 배우 임지연은 동양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신비로운 외모에 대한 상찬을 받던 배우였다. 영화 '인간중독'과 '간신'에서 임지연은 자신의 선택을 책임지기 힘든 상황에 놓인 인물들을 연기했고 관습적인 캐릭터, 프레임 안에 갇힌 배우의 연기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배우라는 뿌리를 내린 임지연은 2023년에 이르기까지 휴식기 없는 활동을 이어왔다. 드라마와 영화를 오갔고 예능도 출연하며 꾸준히 대중 앞에 모습을 보여왔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데뷔작 이후 임지연의 선택은 종 잡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웠다. 액션과 코미디, 가족 드라마와 사극, 청춘물과 스릴러까지 배우 임지연은 자신의 확신을 위해 수많은 종목에 도전해 본 것처럼도 느껴진다. 이 과정에서 큰 성공이나 거대한 실패는 없었지만 중요한 건 잦은 도전이다. 크게 공들여 말하지 않는 배우에 대한 박하거나 과한 평가와 무관하게 스스로 뿌리내린 자리에서 자신에게 알맞은 두께를 만드는 시간. 올해의 임지연을 보고 있자면 마치 그 자리에서 자라고 있던 나무가 만든 그늘을 올려다보는 듯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지점은 배우 임지연이 평단과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 작품들이 모두 최근작인, 여성 서사 혹은 여성 상대역과의 비중이 큰 역할들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 영화와 드라마가 여성 캐릭터를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말일 수도 있다.

 '더 글로리' 속 배우 임지연이 남긴 수많은 명대사 중 하나인 "알아 들었으면 끄덕여"를 떠올리면 이제 기분 좋게 고개가 끄덕여진다. 이 배우가 무성하게 흔들릴 잎사귀들이, 떨구고 피워낼 새로운 시간들이 못 견디게 궁금해서다. 의미심장하게도 임지연의 차기작은 영화 '리볼버', 함께 호흡을 맞추게 될 배우는 거목 전도연이다. 코가 다 뚫릴 것 같은 숲이 만들어지고 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
  • 글자크기
  • 글자크기
  • 홈
  • 메일
  • 스크랩
  • 프린트
  • 리스트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스토리
  • 밴드
기사에 대한 독자 의견 (0 개)
이         름 이   메   일
1069 왼쪽숫자 입력(스팸체크) 비밀번호 삭제시 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