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국제 사회 속 대한민국의 위상은 코로나 팬데믹 이후 크게 향상되었다. 여기에는 K-pop과 한국 드라마의 기여가 크다. 여러 문화권에서 공통된 한국 드라마의 인기 비결은 섬세한 감정의 묘사와 흐름, 개인사에 사회상을 녹여 내 재미와 문제의식을 동시에 담는 복합성, '우리'라는 공동체성이다.
하지만 현실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요즘 아이들과 청년들에게서 자주 듣는 말 중 하나가 '손절'이다. 이 신조어는 향후 더 큰 주가 하락이 예상될 때 손해를 감수하고 주식을 파는 행위인 손절매(損切賣)에서 왔다고 추정된다. 고로 '손절'은 예상되는 미래의 더 큰 고통이나 손해를 방지하려 관계를 단절하는 행위를 말한다. 왕따와 학교폭력, 타인과 사회에 대한 무관심은 우리 사회의 두렵고도 익숙한 일상이다. 그러니 나를 괴롭히고 착취하는 사람을 멀리하고 방어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멀어짐'과 달리 '손절'에서는 어떤 경직성과 고립이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손절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겉은 딱딱하고 속은 공허해 때론 부서질 듯 아슬아슬하다.
또 다른 진료실 풍경. "어떤 감정이에요?"라는 질문에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은 이제 일상적이다 못해 자동반사적이다. 자신의 감정을 인식하고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타인의 눈을 마주 보고 대화하는 것이 힘들다. 신경이 곤두서 있어 사소한 일에도 눈물이나 화가 솟는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면 멍하고 무기력해지다가 갑자기 찾아드는 텅 빈듯한 우울에 공포스럽게 압도된다.
대화형 인공지능이 화제 되면서 미래 사회에 대한 예측·걱정이 난무하더니 허무하도록 금세 아무렇지 않다. 이대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지도 못한 채 그마저도 인공지능이 알려주고 조절해주는 그런 세상을 살게 되는 걸까?
진화 생물·심리학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을 가장 고도로 가축화한 종이다. 털이 사라진 얼굴과 검은 눈동자를 둘러싼 흰 공막을 통해 자신의 감정과 시선의 방향을 타인에게 노출하는 위험을 선택한 것이다. 타인과 함께 살기 위해. 언어 역시 소통을 위해 출현하고 발전했다. 그런 우리가 타인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그의 입장을 상상하지 못하며, 자신의 감정을 느끼고 조절하지 못한 채 힘들면 '손절'해 자기 속에 고립되어 산다. 지구가 기후 위기로 위태롭듯 인간은 감정과 소통의 위기로 위급하다.
영어, 수학, 코딩보다 우선 학습해야 할 이 시대의 과제는 감정과 소통이다. 가정과 학교에서 이를 가르쳐야 한다. 뇌과학의 연구 결과 역시 감정, 느낌의 발달이 창의성, 사회적 판단력과 연관돼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감정, 소통, 느낌 수업을 만들자. 감정과 소통은 다른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조율되고, 자기 성찰에 의해 알아차려지며, 훈련되고 체화된다. 이때 상대의 입장이 돼보는 공감적 상상력은 이 과정의 핵심이다.
결국,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신윤경 봄정신건강의학과의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