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 그 성과와 능력으로 오랜 시간 존경을 받는 사람을 우리는 거장이라고 부른다. 거장은 한 자리에서 뿌리내린 채 그늘을 넓혀가는 나무를 닮은 존재다. 어떤 분야에 몸 담고 있던 우리는 수많은 시도와 실패를 맛보기 마련이다. 예상보다 더 자주, 타고나지 않은 재능을 원망하고 노력하지 않는 스스로에게 실망한다. 믿을 것은 성실뿐이라고 수차례 다짐해도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를 숨긴 협곡들에 서면 나의 성실이 안전장치가 되기도 어렵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쉬게 할 공간을 찾기 마련이다. 포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계속할 수 없을 때, 그때 거장의 존재는 우리에게 위로가 된다. 거장의 존재감은 열정으로 달궈진 몸을 식혀주고 쓸쓸함과 분노로 뒤엉킨 마음을 위로해 준다. 나보다 먼저 그리고 멀리, 높이 길을 찾아 걸은 이는 그 뒷모습 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기 마련이다. 질투의 감정조차 머쓱하게 만드는 이들, 오르기 어려운 산 같고 넘기 힘든 강 같지만 그래서 더욱 자연스럽게 바라보게 되는 누군가의 자취는 유명을 달리해도 소멸되지 않는다.
영화 '시네마 천국'으로 잘 알려진 주세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영화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는 영화 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의 생을 담고 있는 다큐멘터리다. 영화음악에 대해 잘 모르는 이들이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이름인 이탈리아의 작곡가 엔니오 모리꼬네. 지난 2020년 세상을 떠난 그의 유년기부터 길고 아름다웠던 전성기를 천천히 들여다보는 이 작품은 2시간 30여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동안 서두르지 않고 한 예술가의 사랑으로 충만했던 삶을 펼쳐낸다. 본인이 신인이었던 시절 '시네마 천국'이라는 작품을 통해 연을 맺게 된 거장 엔니오에게 바치는 주세페 감독의 애틋한 러브 레터이기도 한 '엔니오:더 마에스트로'는 영화와 음악을 사랑했던 이들에게도 마음으로 쓰는 연서가 된다. 그의 음악에 한 번이라도 마음이 울렁대고 일렁였던 이들이라면 이 영화를 보는 일은 직접 닿을 순 없지만 충분히 뻗을 수 있는 마음으로 장면에 겹쳐 쓰는 러브 레터의 순간들이 될 것이다.
'미션'과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황야의 무법자'와 '시네마 천국', '러브 어페어'와 '헤이트풀 8'을 가로지르는 엔니오의 필모그래피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 서부극과 멜러, 휴먼 드라마와 SF 액션 장르까지 엔니오의 선율은 '영화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듣고 있다'는 느낌을 그 누구보다도 여실히 전해준 아티스트다. 이 작품을 영화관에서 관객들과 함께 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관객의 연령대에 따라 반응하는 구간이 달랐다는 점이다. 엔니오가 영화음악가가 되기 이전의 서사가 지나고 나면 영화관은 본격적으로 그의 음악과 영화가 스크린에 펼쳐지는 공연장으로 변모한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관객들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탄성을 자아내기 시작한다. 그의 초기작인 '황야의 무법자'가 1966년의 작품이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와 '미션'은 1980년대 중후반의 작품이다. 영화관 안에는 유독 장년층의 관객이 많았는데 이 영화들의 메인 테마가 흘러나올 때 내 옆자리에 앉았던 부부는 발까지 동동 구르는 신이 난 모습이었다.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관객들은 마치 마법의 가루를 뿌린 듯 흘러나오는 '시네마 천국'의 테마에 일제히 반응했다. 콘서트에 가까운 극장의 분위기가 이어졌다. 최근 유명 뮤지션들의 공연 실황 영상이 극장에서 상영되며 큰 호응을 얻고 있는 것과는 또 다른, 그야말로 영화와 음악이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증명하는 순간이었다. 60여 년 전의 영화가 스크린에 생생하게 살아날 수 있는 큰 이유 중 하나가 엔니오 모리꼬네의 음악이었다는 것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음악이 먼저 영화를 기억하게 만든다는 것은 마치 오랜만에 옛 친구의 목소리를 듣고 뿌옇던 그의 얼굴이 그려지는 것과 같은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엔니오 모리꼬네는 1961년부터 2017년까지 영화음악가로 활동했다. 무려 반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현역으로 활동해 온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 그는 여전히 자신은 음악을 통해 무엇인지 모를 어떤 것을 찾게 될 것이라며 호기심과 확신에 가득 찬 눈으로 카메라를 바라봤다. 그의 손에 뒤늦게 쥐어진 오스카의 트로피보다 그가 여전히 힘 있게 쥐고 있는 악보를 향한 연필이 더 근사했다. 정확한 자리에 놓인 스탠드의 불빛이 비추는 스포트라이트야말로 그를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빛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타인의 박수와 환호로는 온전히 채울 수 없는 충만함이 바로 거기에 있었다. <진명현 독립영화 스튜디오 무브먼트 대표(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