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일보] 어제 지인에게서 요즘 아이들이 "안타깝다"는 감정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숨과 함께 안타까움과 두려움이 가슴을 메웠다.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많지만 주변과 미디어를 살펴볼 때 타자에 대한 연민이 희박해지는 세상이라는 인상이 강하다.
개별 가정 단위에서 보자면, 한편에는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취급하며 학대하는 부모가 있고, 반대편에는 자녀를 왕자와 공주로 모시며 나르시시즘을 부추키는 왜곡된 사랑의 부모가 있다.
역사적 관점에서는 근대 부르주아의 출현으로 개인의 자유와 욕망 추구가 세계적 흐름이 되면서 아동의 자유와 권리도 성장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지속, 강화되는 중에 현대는 독일의 사회학자 레크비츠의 말처럼 "단독성들"의 과잉 히스테리 사회로 진입했다. 보편의 힘은 약화되고 나의 특수성은 불가침의 정의가 되어 상식이 실종되고 합의는 불가능해졌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 채 폭력에 억눌리기만 한 아이들과 받는 것이 당연하고 익숙한 아이들 모두 자신의 결핍에 민감하고 타인에게 무관심하다.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상대에게 분노하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폭력적이 된다. 극과 극은 다른 듯 서로 닮아 있다.
현대는 초연결 사회이자 보여지는 것에 대한 욕망이 삶의 동력이 된 시대이다. 미디어에는 예쁘고 똑똑하고 재능 넘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들과 그들의 생산물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훌쩍 지나간다. 잘 난 사람들을 구경하며 자신도 타인들의 구경거리가 되고 싶지만 현실의 나와 내 주변은 시시하다. 주변의 누군가를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밥 먹고 노는 것은 귀찮은 시간 낭비다. 미디어에서 보듯 근사하고 매끄럽고 빠르고 재밌지 않다. 구경은 자유롭고 책임이 없지만 만나는 관계는 책임이 따르고 합의가 필요하니 번거롭다. 미디어를 보거나 나를 돋보이게 할 무언가를 갈고 닦거나 게임을 하는 편이 훨씬 좋다.
연이어 극단적 폭력에 대한 뉴스가 쏟아진다. 이들의 공통 분모에는 관계의 상실이 있다. 이들은 만나서 일상의 감정과 생각을 나눌 사람이 없이 오로지 미디어로만 세상에 연결되어 있다. 계속해서 내가 원하는 쪽으로만 정보를 물어다 주는 미디어 세상 속에서 내면은 점점 왜곡되고 고착된다. 자신과는 아무 상관없이 돌아가는 혹은 자신을 무가치하고 혐오스럽다며 내쫓는 세상에 대한 이들의 허무와 두려움, 분노는 해소될 길 없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어느 순간 역치를 넘어 발화되면 이는 핵폭탄급 에너지로 세상을 파괴한다. 자신을 붙잡아 주는 현실의 관계망이 없기에 그들은 이미 타인의 생명뿐 아니라 자신의 생명에도 안타까움이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영어, 수학에 대한 선행학습과 특수성에 대한 강조가 아니라 교감과 소통, 상식과 보편을 배울 때다. 보편성이 힘을 회복해 특수성과 새로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이들은 온라인을 통해 배우기 어렵다. 상대와 눈을 마주치고 표정을 보며 손을 잡기도 하는 중에, 함께 밥 먹고 놀며 작업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익혀지는 것이므로.
사랑받기 원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다. 그러니 아이들이 자신과 타자를 돌보도록 가르치자. 삶이 따르지 않는 말은 힘이 없다. 그러니 나부터. <신윤경 봄정신건강의학과의원장>